<스토커>에서 클림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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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한때 미술 평론가를 꿈꿨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 (단편영화 <청출어람>(2012)과 <파란만장>(2010)을 공동 연출한 그의 동생 박찬경은 영화감독이자 설치미술가다.) 그의 영화에서 목격되는 무수한 상징과 기호들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종종 명화의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가져오길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스토커>에서 인용 혹은 변주되는 명화는 다름 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The Kiss>(1907)와 <유디트 Judith I>(1901)다. <스토커>는 이야기의 특성 상 사건보다는 사건을 통해 조성되는 인물들 간의 감정 선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키스>와 <유디트>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살펴보는 것은 곧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의도한 바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스> 삼촌이지만 괜찮아
   
<스토커>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이은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소녀’ 이야기다. 이름은 인디아(미아 와시코우스카)로, 1994년생인 그녀는 지금 막 18살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축하 대신 비보가 날아든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숨진 것. 그런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존재조차 모르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나타나자 마음을 뺏긴다. 말하자면,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이 못마땅한 인디아에게 찰리는 답답한 이 집에서 탈출구를 제공할 구세주다. 다만 엄마가 찰리에게 유혹을 보낸다고 생각한 인디아는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다.

<스토커>는 인디아가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생일 때마다 미지의 인물로부터 받았던 구두를 벗고 찰리가 선물한 하이힐을 신는 과정?) 더 정확히는 엄마 이블린에게서 독립하는 사연을 다룬다. (장례 음식을 준비하던 여인들이 “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라고 수군대자 인디아가 반항하듯 계란을 박살내니,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과정?) 찰리는 이를 와인에 빗대 이야기하는데 (“이 와인은 1994년산이죠. 이 정도로 무르익지 않으면 풋내 나서 못 마셔요.”) 결국 <스토커>는 인디아가 풋내를 벗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가 풋내를 벗는다는 건 곧 성(性)을 알아간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안 그래도, 찰리는 인디아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상(喪)중임에도 이블린이 유혹의 눈길을 보내자 찰리는 이에 응하는 척하지만 실은 인디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방과 후에 맞춰 학교에 오는가 하면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권하기도 한다. 호기심과 반항심이 뒤섞인 (이블린 왈, “넌 섞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잖니”) 인디아는 일단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만 피아노를 치던 그녀 옆으로 찰리가 다가와 몸을 감싸자 이내 마음이 사르르 녹고야 만다.

이 장면은 흡사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킨다. <키스>는 키스하는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그 모습이 <스토커>의 피아노를 매개로 하나가 된 인디아와 찰리의 포즈와 닮아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활약했던 클림트는 주로 성과 나체를 주제 삼은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기존 화단의 점잖고 권위적이던 화풍과는 완전히 결별했다는 의미에서 분리파로 분류됐다. 그런 맥락에서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의 화가’로 불렸는데 <키스>는 그런 특징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퇴폐적이거나 세련되거나, <스토커>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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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무엇보다 황금빛 이미지가 부각되는 까닭에 퇴폐적이면서도 세련된 기운을 발산한다. <키스>만 해도 남녀가 감각하는 사랑의 절정이 그림을 뒤덮고 있는 황금빛으로 만개한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은 클림트의 특징은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이 보여주는 연출과 맞닿아있다. 이블린과 인디아 모녀(母女)의 꺼져있는 사랑의 기운에 불을 지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치근대는 자'(stalker)가 아니라 ‘불을 지피는 자'(stocker)다.) 찰리는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나 결정적인 순간, 황금빛에 가까운 재킷과 티셔츠, 바지를 착용한다.  

문제의 피아노 장면에서 인디아와 찰리가 보여주는 협연은 섹스의 은유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근친이라는 점에서 퇴폐적이지만 이 장면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기운은 세련됨에 가깝다. 피아노 뒤의 스탠드가 이들의 행위에 황금빛을 은은하게 퍼뜨릴 뿐 아니라 동일한 콘셉트의 마룻바닥이나 벽지, 커튼 또한 금빛의 오라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절정의 순간을 감각하는 건 순전히 인디아뿐이다. 옆을 돌아보니 찰리는 ‘불을 지피는 자’답게 홀연히 사라진 상태다. 이건 인디아의 자위일까, 섹스일까? 그리고 찰리는 과연 누구인가?

<키스>는 황홀히 취해 있는 남녀를 묘사하지만 그 수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제목과 다르게 남자는 굳게 다문 여자의 입술이 아닌 볼에 키스하고 있고 그녀의 표정은 황홀함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여자의 피부도 남자와 다르게 하얗다 못해 시체를 연상케 할 만큼 창백한 수준이다. 게다가 자칫 발을 잘못 놀리면 절벽으로 떨어질 것처럼 여자는 아슬아슬한 포즈로 남자의 무게를 버티는 듯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키스>에 대해 죽음에 대한 매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키스>는 어떤 게 진짜이고 실제이며 사실인지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린다. 퇴폐와 세련이 공존하는 것처럼 경계가 주는 혼란은 무섭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클림트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키스>에 낭만성을 부여했다. <스토커>도 마찬가지다. 소녀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인디아는 성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경험하는 순간이 두렵기만 하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했던 기존의 자신을 죽여야만 넘을 수 있는 영역이다. 결국 인디아가 성(의 절정)을 경험한다는 건 곧 죽음에의 매혹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유디트> 모가지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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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디아가 실제인지, 환영인지 모를 피아노에서의 행위 후 실질적으로 갖는 첫 경험은 동시에 죽음을 포함한다. 찰리가 엄마 이블린과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한 인디아는 질투심에 사로 잡혀 충동적으로 같은 반 남학생 윕(알덴 에렌리히)을 불러낸다. 철길을 건너 (소녀에서 성인으로 선을 넘는 상징적 행위?) 숲속으로 들어간 인디아는 윕을 유혹해 키스를 하지만 그 이상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윕은 인디아를 거칠게 몰아붙이지만 귀신처럼 나타난 찰리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때 찰리가 윕을 살해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허리의 벨트를 풀어 목에 건 후 뒤에서 당겨 꺾어 죽이는 것이다. 찰리가 살해한 이들은 모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목을 잃었다. 왜 목일까? 그 힌트는 윕과의 첫 경험으로 성인식(이를 자축하듯 인디아는 ‘더러워진 하얀 옷’을 벗고 샤워 중 자위를 하며 절정의 순간을 맛본다.)을 마친 인디아가 평소에 입지 않던 야한 잠옷을 입고 이블린을 찾아가는 엄마의 방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인디아는 이블린의 머리를 빗어주는데 거울로 통해 반사된 이들의 모습이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슷해 보인다.

‘유디트’는 위기에 빠진 페르시아를 구한 여인으로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아시리아군(軍)에게 포위되자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 호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벤 것. 그림은 이와 같은 배경을 호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럼 찰리는 <스토커>의 유디트 같은 존재인가? 사실 <유디트>는 클림트 그림의 속성상 유디트의 성적 매력과 죽음에의 매혹이 더욱 강조된다. 즉, 주제를 공유하는 <스토커>가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하는 연장선상에서 목을 자르는 행위를 등장시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러니까 잘린 목은 부차적인 요소다. <유디트>에서도 호로페르네스의 목이 하단에 잘려서 묘사되는 까닭에 살해 행위는 여기서 살짝 물러난 주제다. 오히려 금빛 미장센에 파묻힌 유디트의 몽롱한 눈빛과 살짝 벌린 입술, 훤히 드러난 가슴은 그녀를 팜므파탈로 규정한다. 특히 클림트는 유디트의 얼굴이 젖혀 보이게, 잘린 목은 앞으로 기울어 보이게 잡음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구도를 확실히 한다. 즉, <스토커>가 <유디트>의 이미지를 취하는 건 인디아가 지배를 받는 아이에서 지배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인디아가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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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와 찰리 간의 일대일 대면이 처음 이뤄지는 장소는 계단에서다. 2층에 서있던 찰리가 그를 올려다보는 인디아에게 “네가 왜 불리해 보이는 줄 알아? 내 아래에 있기 때문이야”라는 요지의 말을 건넨다. 그러자 인디아는 그에 질세라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같은 위치에서 찰리를 바라본다. 인디아가 이블린의 방을 찾아 벌이는 일련의 행위도 이와 흡사하다. 이블린을 앉혀두고 바로 뒤에 서서 머리를 빗겨주는 인디아의 행위에서는 목을 따서라도 엄마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게 읽히는 것이다.  

그럼 인디아는 왜 그렇게 이블린에 대해 부정적인 걸까. 영화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찰리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 의문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다. 이는 찰리가 왜 인디아에게 집착하는 걸까, 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중요한 질문이다. 영화 후반에 전모가 드러나지만 인디아의 아버지이자 이블린의 남편인 리처드(더모트 멀로니)가 살해된 건 찰리에 의해서다. 찰리는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첫째인 리처드가 막내에게만 관심을 갖자 분에 못 이겨 셋째를 살해하고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에 갇힌 터다.

그리고 퇴원하던 날, 찰리는 리처드를 죽이고 인디아의 생일에 맞춰 이블린 모녀를 찾아온다. 찰리에게 이 날은 다시 태어난 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찰리와 인디아는 같은 인물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는 둘의 동일성을 노골적일 정도로 드러낸다. 누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걸 몹시 싫어하는 인디아처럼 찰리 역시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여직원이 포옹하려 들자 흠칫 놀라 처음엔 몸을 피한다. 또한 찰리의 가방을 뒤지던 인디아가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한다든가, 아빠가 숨긴 찰리의 편지를 읽을 때 둘의 목소리가 합해진다는 점도 그렇다.

이를 상기한다면, <키스>가 연상되는 피아노 장면에서 둘이 엉키는 장면은 찰리와 인디아의 동일성에 대한 상징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는다. 그러면 인디아와 이블린 간의 반목도 충분히 이해될 법하다. 찰리가 형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처럼 인디아 역시 이블린이 엄마로서의 사랑을 온전하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결국 찰리와 인디아가 겪는 성장통의 정체는 손윗사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해야 이들은 어른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살부(殺父) 의식이다. (리처드와 찰리는 무려 9살 차이다.)  

박찬욱 감독이 <유디트>의 이미지를 끌고 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찰리가 리처드를 살해하는 장면은 선명하되 인디아가 이블린을 죽이지는 않기에 다소 혼란을 느낄 법도 하다. 대신 인디아는 찰리를 얻음으로써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이블린을 제치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그에 더해, 인디아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찰리마저 제거하기에 이르니, 엄마로부터의 독립에 이어 그녀는 완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디아는 “어른이 된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던 걸까.

영화가 시작되면 인디아는 “남들이 잘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며 내레이션을 한다. 이는 <스토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반복이 되는데 찰리를 살해하고 엄마를 떠나 뉴욕을 향하던 인디아가 어른이 된 후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발현이다. 여기에는 <유디트>의 그녀처럼 목적을 달성한 후 감각하는 승리감의 황홀한 도취가 짙게 배어있다. <키스>에서처럼 수동적이었던 인디아가 이제는 위치를 바꿔 초식동물에서 포식자로 우뚝 서기에 이른다. 소녀는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movieweek
NO. 569

2 thoughts on “<스토커>에서 클림트를 보았다”

  1. 항상 뛰어난 리뷰들 잘 읽고 있습니다. 근데 이 리뷰는 정말 뛰어난거같아요ㅜㅜ 다시한번보고싶게해주시네요

    1. 안녕하세요 와우님 ^^ 좋은 말씀 해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 맛에 글을 쓰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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