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의 23번째 작품 <스카이폴>은 전작들보다 좀 더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도 없고 연출도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멀었던 샘 멘데스가 맡았다. 게다가 샘 멘데스는 <스카이폴>을 마치 히치콕의 영화처럼 만들어버렸다. (주의! 영화의 감상을 방해할 수 있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샘 멘데스는 <007 스카이폴>(이하 ‘<스카이폴>’)의 메가폰을 잡자마자 어떤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 것이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메리칸 뷰티>(1999)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등 이른바 작가적 개성이 뛰어난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니 만큼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007 시리즈에 뭔가 다른 색깔을 입히지 않을까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샘 멘데스의 답변은 똑같았다. “클래식한 007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마침 <골드핑거>(1964)에서 처음 등장했던 본드의 애마 ‘애스턴 마틴 DB5’가 등장하는 <스카이폴>의 스틸이 공개되자 팬들 사이에서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과거 숀 코너리와 같은 스타일의 제임스 본드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둥의 억측이 난무했다. 그런데 웬걸, 샘 멘데스가 언급한 클래식의 지향점이란 007 시리즈의 위대한 유산이 아닌 알프레드 히치콕, 그중에서도 <현기증>(1958)이었다.
히치콕이 007을 연출했다면
007과 히치콕, 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는 조합이지만 사실 이 둘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 히치콕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열성적인 팬으로, 1950년대 초반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한편으로 <007 위기일발>(1963)이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의 특정장면, 허허벌판 위에서 캐리 그랜트가 농약살포헬리콥터에 쫓기는 장면을 그대로 가져가 본드와 헬리콥터가 벌이는 결투로 만들었다고 불쾌하게 여겼다. 이후에 발표된 <토파즈>(1969)의 경우, ‘히치콕이 만든 제임스 본드 영화’라고 불릴 정도로 첩보영화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었다.
샘 멘데스가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스카이폴>을 ‘007 버전의 <현기증>’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샘 멘데스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스카이폴>과 <현기증>의 연관성에 대해 얘기한 적은 없다.) 다만 올해 8월 영국의 영화 월간지 <사이트&사운드>를 통해 발표된 역대 최고의 영화 설문에서 샘 멘데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 10편 중 1편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포함시켰다. 마침 그 당시는 샘 멘데스가 <스카이폴>의 후반 작업으로 한창이던 때인데 그에게는 제임스 본드 50주년 기념에 맞춰 이언 플레밍의 원작과 상관없이 독립적인 007 영화를 만들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진 상태였다.
실제로 샘 멘데스는 그 자신이 히치콕이었다면 007을 이런 식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투로 이야기 구조부터 테마, 심지어 특정 장면의 재현까지 <현기증>을 그대로 따른다. 이 아이디어가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스카이폴>과 <현기증>은 과거 혹은 과거의 인물에 사로잡힌 주인공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테마를 공유한다. <현기증>의 존(제임스 스튜어트)은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내의 뒤를 밟아달라는 친구의 요구에 따라 매들린(킴 노박)의 뒤를 따른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매들린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자 존은 실의에 빠진다. 이후 우연히 그녀와 닮은 주디(킴 노박 1인 2역)를 만나게 되고 존은 매들린처럼 치장해달라며 집착을 보인다.
<스카이폴>의 경우, <현기증>과 장르 자체가 다르지만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가 처한 상황은 존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본드는 비밀요원의 정보를 훔친 적과 대치하던 중 M(주디 덴치)의 발포 명령으로 이브(나오미 해리스)가 쏜 총에 맞아 강 아래로 추락한다. 임무가 실패하자 비밀요원들이 하나둘 살해되기 시작하고 M16는 위기에 빠진다. 이에 M은 퇴출될 위기에 몰리지만 실종됐던 본드가 다시 돌아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러니까, <현기증>이 존과 매들린의 기이한 연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카이폴>은 제임스와 M 사이의 베일에 쌓인 관계를 따라간다. 007 시리즈의 전작에서 M과 제임스는 단순 상하 관계였던 것에 반해 <스카이폴>에서는 좀 더 복합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존과 제임스, M과 매들린
테마 이전, <스카이폴>과 <현기증>의 유사성은 인물의 구성에서부터 쉽게 감지된다. 먼저 이름의 유사성부터. <스카이폴>의 제임스 본드와 <현기증>의 존 스카티 퍼거슨은 ‘J’로, 본드의 상관 M과 존이 사랑하는 여인 매들린(Madeleine)은 모두 ‘M’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졌다. 재미있는 건 M과 매들린의 관계다. <현기증>에서 매들린은 가짜 자살 이후 주디라는 이름으로 존과 해후하게 된다. M과 매들린의 이름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대로고 <현기증>의 주디(Judy)와의 관계는 <스카이폴>에서 M을 연기한 배우가 주디 덴치(Judi Dench)라는 점에서 또한 ‘J’의 유사성을 갖는다. 그런데 M과 매들린, 혹은 주디와 주디 덴치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은 단순히 이름에만 있지 않다.
이들은 각각의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와 존을 위기에 빠뜨리는 팜므파탈의 기능을 갖는다. <현기증>에서 매들린이 존의 영혼을 홀리는 묘령의 여인을, 주디가 매들린이라는 원죄로 존에게 단죄당하는 역할을 한다면 <스카이폴>의 M은 본드를 사지로 몰아넣는 직속상관으로, 그러면서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체 어머니 역할로 일종의 1인 2역을 맡는다. 이야말로 <스카이폴>이 전작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지점인데 샘 멘데스가 왜 이 영화를 007 버전의 <현기증>으로 밀어붙였는지 추정되는 결정적인 부분이라 할 만하다. 그럼으로써 <스카이폴>은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본드와 M 모두 입체적인 캐릭터의 층위를 갖게 된다. 두 여자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현기증>의 존이 정신분석학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제임스 본드 역시 그가 가진 마음 속 비밀, 즉 트라우마를 꺼내놓기에 이른다.
요컨대, 본드에게 있어 M은 애증의 대상이다. 샘 멘데스가 <스카이폴>의 악당으로 전직 M16 요원이었던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를 등장시킨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실바는 적에게 잡혔을 시 그 존재를 부정한다는 M16의 내부 규칙에 따라 구조되지 못하고 장애를 갖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그때의 원한이 남아 M16 요원들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 최종적으로 M에게 복수하려드는 것이다. 그것이 비단 M에게 갖는 실바만의 감정일까. 본드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게 있다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본드를 M이 거둬줬다는 것. (이때 M은 “고아야말로 M16 요원이 되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M의 발포 명령으로 왼쪽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본드에게 이 상처는 M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즉, <스카이폴>은 본드가 M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영화다. <현기증> 또한 지붕 위에서 범인을 쫓다 고소공포증을 갖게 된 존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매들린/주디 캐릭터를 개입시켰다. 하여 <스카이폴>은 <현기증>의 전개 방식을 고스란히 따른다. <현기증>에서처럼 <스카이폴> 역시 본드가 지붕 위에서 적을 추격하는 장면으로 오프닝을 열고, 히치콕이 현란한 조명의 미장센으로 존의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처럼 샘 멘데스도 간판 조명을 활용해 혼란을 느끼는 본드의 심리를 묘사한다. 또한 미행하는 존의 시점에서 매들린이 미술관에 들러 넋이 나간 채 그림을 보는 <현기증>의 장면을 인용, <스카이폴>은 그림을 보고 있던 본드에게 접근한 Q(벤 위쇼)가 신무기를 전달하는 장면으로 비튼다. 그리고, <현기증>의 마지막 무대가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성당이었던 것처럼 <스카이폴>은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역으로 이동, 마지막 격전을 치른다.
스카이폴의 의미
여기서 드는 궁금증. 그럼 도대체 ‘스카이폴'(skyfall)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 <현기증>과는 또한 어떤 연관을 맺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카이폴은 어릴 적 본드가 살았던 장소로 이곳에서 부모를 모두 잃고 이를 계기로 남자(?)로 거듭난 저택의 이름이다. 뭔가 거대한 의미를 기대했던 관객들이라면 다소 싱거울 수 있겠지만 스카이폴은 맥거핀(macguffin, 속임수 혹은 미끼라는 뜻으로, 극의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헛다리짚기’ 장치를 말한다.)의 기능을 넘어서 본드와 M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써 작용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릴 적 본드의 집 이름이 스카이폴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법하다.
<스카이폴>을 지배하는 정서는 다름 아닌 ‘추락’이다. 열차 위에서 총을 맞고 ‘떨어진’ 이후 본드는 요원으로서의 능력에 의심을 받으며 위상이 ‘급전직하’한다. 심지어 어깨 부상이 후유증으로 남아서인지 적을 쫓던 중 에스컬레이터에 매달렸다가 통증이 도져 ‘추락’할 뻔한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건 M 역시 다르지 않아서 본드를 잃고 라울의 공격으로 M16이 존폐의 기로에 서자 영국 정부 내에서 위신이 ‘떨어지며’ 청문회 출석을 요구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제임스 본드나 M이나 모두 하늘(sky)에서 추락(fall)하는 듯한 최악의 사태로 개인적으로나 조직 내에서나 궁지에 몰리게 되니, 영화의 마지막 격전지가 되는 스카이폴은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최후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 장소는 히치콕의 <사이코>(1960)에서처럼 본채와 별채가 나눠진 구조이면서 특히 별채내부는 <현기증>의 마지막 무대인 산 후안 바티스타처럼 성당의 형태를 띄고 있어 흥미롭다. <현기증>에서도 추락은 영화를 지배하는 주요한 정서였다. 존의 고소공포증이나 그로 인해 형사 업무를 포기할 수밖에 없어 지위를 박탈당하는 등 일련의 에피소드는 모두 추락의 정서를 구체화한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주디의 비밀을 간파한 존은 그녀를 끌고 성당의 종탑으로 올라가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에 더해 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결국엔 주디를 종탑 아래로 떨어뜨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그녀가 지은 죄를 벌하는 효과까지 얻게 된다.
이처럼 구원과 단죄를 모두 행할 수 있는 장소로 성당만한 곳은 없다. <스카이폴>이 <현기증>을 원전삼아 따라온 것을 감안하면 스카이폴의 별채의 내부 구조를 성당을 연상시키는 장소로 구상한 것도, 그럼으로써 본드에게는 구원을, M에게는 단죄를 가하려는 셈 멘데스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이건 그동안 이어오던 007 시리즈의 위대한 유산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결코 아니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참여한 <카지노 로얄>(2006)에서부터 서서히 감지된 것인데 원래 본드는 트라우마가 많은 인물이다. 베스퍼(에바 그린)에게 크게 속은 이후부터 여자를 믿지 못해 가벼운 관계를 가져가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샘 멘데스는 본드와 M을 유사 모자 사이로 가져감으로써 인간적인 부분을 더욱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감정의 정서는 전작들에서는 전혀 목격할 수 없었던 007 시리즈의 새로운 면모다. 샘 멘데스가 시리즈의 한 축을 이루면서 소홀히 다뤄지던 M의 비중을 높인 건 그동안 한 번도 성장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본드의 홀로서기를 이뤄주기 위함이다. <현기증>의 존이 매들린/주디의 저주에서 벗어남으로써 고소공포증을 극복했듯 <스카이폴>의 본드는 M의 지배 하에서 벗어남으로써 24번 째 시리즈에서는 좀 더 성장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이 샘 멘데스가 007에 <현기증>을 끌어들인 이유이면서 007 제작진이 시리즈 사상 전례 없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자를 영입한 이유다. <스카이폴>은 007 제임스 본드 50주년 기념에 걸맞은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Tip! <스카이폴>에서 목격되는 또 다른 히치콕 영화의 흔적들
① <다이얼 M을 돌려라>의 오인 받은 여자
히치콕이 영화에서 자주 사용한 테마 중 하나가 바로 ‘오인 받은 주인공’이다. 대표적으로 <다이얼 M을 돌려라>(1954)에서 마고(그레이스 켈리)는 집안에 침입한 괴한을 정당방위로 죽였다가 의도적인 살해범으로 몰려 사형선도까지 받게 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스카이폴>의 M도 자신의 요원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국 정부로부터 쫓겨날 위기에 처해 청문회 자리에까지 불려나간다. 능력 없는 상관으로 오인 받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② <사이코>의 저택 구조
<사이코>의 베이츠 모텔은 앞쪽에 가로 형태의 모텔이, 뒤쪽에 베이츠 모자(?)가 거주하는 세로 형태의 저택이 하나의 배경을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이코> 정도는 아니지만 <스카이폴>의 스카이폴 구조 역시 어릴 적 본드 가족이 살았던 저택과 그 앞에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지만 가족 성당이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별채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 샘 멘데스는 나름 <사이코> 모텔 버전의 저택 구조로 스카이폴을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③ <새>의 결투 장면
스카이폴의 저택을 최후의 격전지 삼은 본드와 M은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에 모두 나무 판을 대어 실바 일행의 공격에 대비한다. 이는 <새>(1963)의 미치(로드 테일러)가 가족을 새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창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그 위에 나무를 덧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달라, 본드와 M이 숨어있는 저택을 공격하는 실바 일행은 지상전뿐만 아니라 마치 새가 공격하듯 헬리콥터를 동원해 화력을 쏟아 붙는다.
movieweek
NO. 552
저도 성당 보면서 < 사이코>의 그 저택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근래 봤던 < 지상 최후의 사나이>도 떠오르고 그러더라구오. 개인적으로 성당 씬이 제일 좋았더라는. ㅎㅎ
미연씨 만큼은 제 기사에 반응해줄 지 알았어요. ㅋㅋ 농담이고요, < 스카이폴> 정말 재밌죠. 정말 샘 멘데스가 맘 먹고 히치콕에 빙의해서 만든 것 같더라고요. 계속 이렇게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다음 편부터는 힘들겠죠. 아마 안 될거야… ^^;
ㅋㅋㅋㅋㅋ 근데 사실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악당은 별 매력이 없더라구요. 동기도 그리 감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것도 없고. 그냥 그 배우 아니었으면 어쩔뻔…이런 기분. ㅎㅎ 오히려 < 향수> 이후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만난 벤 위쇼가 눈에 들어오더이다. ㅎㅎㅎ 아. 샘 감독님. 화이팅… ㅋㅋㅋ 이렇게만이라도
그러니까요, 라울이 다크 나이트의 조커 닮았다는 얘기들이 있던데 일리 있기는 한데 조커 포스는 반도 못 따라가지 않나요 스카이폴의 가장 큰 단점이러고 생각해요 ^^;
오프닝 옥상 씬은 정말… 좋았어요.. 그 뒤로 이어지는 특유의 007 오프닝 씬도 특히 맘에 들었구요.
007 스카이폴, 근래 본 007 영화 중에 제일 좋았어요. 저에게는 올해 최고의 외국영화였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