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히어로가 폭로하는 미국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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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최고 기대작으로 꼽히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이하 ‘<라이즈>’)의 미국 개봉 일은 7월 20일이다. (국내 개봉은 그보다 앞선 7월 9일이다.) 여느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처럼 일찍이 개봉 일이 정해진 상태였지만 <라이즈>는 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올해 11월 6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개봉도 안한 영화를 어떻게 미국 대선과 연관 지을 수 있느냐고? 전작 <다크 나이트>(2008)를 보면 알 수 있다.

<다크 나이트>는 개봉 당시 미국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버락 오바마에 대한 영화였다. 더 정확히는 그해 대선에서의 승리가 유력시되던 오바마에게 국정운영과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였다. 잘 알려졌듯,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을 기반으로 정치인의 역량을 키웠다. 이를 반영하듯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도시배경이 처음으로 뉴욕에서 시카고로 옮겨갔다. 단순한 현실 반영을 넘어 다가올 대선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낼 목적으로 하비 덴트에 대해 극 중 고담 시의 차기 시장으로 유력하다고도 언급한다.

무엇보다 부시에서 오바마로, 즉 백인에서 흑인으로 대통령이 교체된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을 흑과 백의 구도로 가져가길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오바마에게 메시지를 건네길, 극단적인 선과 악은 결국 닮은꼴이어서 흑과 백 사이의 중도의 묘를 발휘할 줄 알아야 어느 한쪽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의 당시 개봉일은 공교롭게도 2008년 7월 18일, <라이즈>처럼 대선을 딱 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럼 <라이즈>는 이번 미국 대선과 관련해서는 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 개봉 전인 까닭에 전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공개된 포스터와 예고편만 봐도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전설은 끝났다. The Legend Ends’ 산산이 조각난 배트맨 가면을 몽타주 한 <라이즈>의 티저 포스터에 실린 태그라인이다. 오바마는 조지 부시에 의해 땅에 떨어진 미국의 위상을 다시금 세워줄 거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2008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허나 오바마의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은 중국에 강대국 지위를 넘겨줄 위기에 처했고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자국의 경제 상황을 거의 뇌사 상태로 몰고 갔으며 중산층은 집이 없어, 젊은이들은 일거리가 없어 거리로 내몰렸다.
   
<라이즈>의 예고편은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라 할 만한 미식축구 경기장이 폭삭 내려앉는 광경을 통해 몰락한 미국의 현재 상황을 은유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송 도중 탈옥한 악당 베인(톰 하디)이 배트맨을 무력화한 후 월스트리트에서 폭동을 일으켜 고담 시를 혼돈에 빠뜨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는 명백히 범죄자로 불러 마땅한 월스트리트의 탐욕주의자들이 불러일으킨 미국의 혼돈을 상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런 장면을 통해 오바마의 무능을 부각, 새로운 인물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오바마로 상징되는 배트맨이 배인을 무찌르고 다시 한 번 고담을 위기에서 구하는 모습으로 오바마에게 유예기간을 주려는 걸까.

<다크 나이트>와 <라이즈>처럼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그 어느 장르보다 가장 예리하게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리부트되어 올 여름 선을 보이는 또 하나의 슈퍼히어로 기대작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원조 격인 <스파이더맨2>(2004)는 <다크 나이트>에 앞서 슈퍼히어로물의 사실주의를 도입한 경우다. 부제를 붙이자면 ‘미국의 88만원 세대 슈퍼히어로’쯤 될 텐데,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집세를 구하지 못해 피자 배달하랴, 그 와중에 악의 세력을 무찌르랴, 공부할 시간도, 잠잘 시간도 없으니 학교는 매일 지각이요, 낙제점은 당연지사. 피터 파커의 모습이 지금 미국의 젊은 세대와 정확히 겹쳐진다.

슈퍼히어로의 진화는 흥미롭게도 미국의 위상이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있어왔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 공식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1978)은 미국과 구(舊)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세계 경찰국가를 지향하는 미국에 대한 상징적인 영화였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슈퍼히어로물은 한동안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를 적으로 상정해 무찌르는 ‘미국 만만세’ 영화로 전락하며 지극히 단순화되어갔다. 이에 변화가 생긴 건 9.11을 전후해 슈퍼 국가 미국의 위상에 의문부호가 생긴 2000년대부터다.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등과 같은 당시 비주류 성향의 감독들이 <엑스맨>(2000) <스파이더맨>(2002)과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 슈퍼히어로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에 따르면 이들 같은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주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남이 소유하지 못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였으며(<엑스맨>), 돈 한 푼 없는 고학생(<스파이더맨>)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소수자였다. 다만 같은 소수자라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은 갑부 히어로는 생활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 없이 평화 수호에만 온전히 그 자신의 능력을 바치며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스파이더맨과는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 슈퍼히어로다.

지난 2008년 영국의 영화 전문지 ‘엠파이어’가 슈퍼히어로를 대상으로 재산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아이언맨이 1000억 달러, 우리 돈 100조가 넘는 재산으로 1위를, 반면 스파이더맨은 고작 50센트(+과자 한 봉지)로 가장 가난한 슈퍼히어로에 선정됐다. 재미로 본 순위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사롭지 않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아이언맨이 코믹스를 통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1960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영화화된 것이 2008년이었고, <아이언맨>이 성공하자 또 한 명의 갑부 슈퍼 히어로인 <그린 호넷>(2011, 주인공 브릿 레이드(세스 로건)는 미디어 재벌의 외아들로 등장한다!)이 뒤를 따른 것도 이와 같은 사실을 방증한다.
 
슈퍼히어로물의 사실주의가 유행을 넘어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면서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모든 영화들에게 현실반영은 필수가 됐다. 그에 따라, 인물의 내적 고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됐고, 세트 차원에서 머물던 공간 묘사는 현장 로케이션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으며 장르의 범위 역시 허구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느와르와 범죄물의 영역까지 넘어가게 됐다. 과거의 슈퍼히어로물이 캐릭터의 수와 이야기의 규모, 기술적인 면에서만 진화를 꾀한 것과 비교하자면 실로 획기적인 변화다.  

급변하는 미국 정세에 발맞춰 슈퍼히어로물의 내러티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지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미국의 현실 반영을 이룬 슈퍼히어로물을 찾자면 단연 <어벤저스>다.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에 홀로 맞서길 즐겼던 슈퍼히어로들이 <어벤저스>에는 올스타 급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맞서야할 적은 외계인으로 모자라 신(God)적인 존재. (‘천둥의 신’ 토르의 이복동생 로키(톰 히들스턴)다.) 안 그래도 현실의 미국이 밖으로는 중국과의 힘겨루기로, 안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침체로 내우외환을 겪다보니 한 명의 슈퍼히어로 가지고는 힘이 딸리는 모양이다. 미국인들이 체감하는 지금의 현실이란 것이 여간해선 감당하기 힘든 초유의 상황이란 것을 <어벤저스>는 보여준다.

<라이즈>의 개봉이 가까워오면서 이 영화에 대한 프리뷰가 경쟁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기사들은 한결같이 배트맨이 맞닥뜨리게 될 악당 베인이 시리즈 사상 최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배트맨 한 명 가지고는 (혹은 남자의 힘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아 여성 슈퍼히어로인 캣우먼(앤 해서웨이)이 등장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단순히 영화 속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미국의 현실과 너무 닮아있지 않은가. <라이즈>의 개봉과 함께 우리는 슈퍼히어로물이 폭로하는 미국의 가장 불편한 진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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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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