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주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의 배우다.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TV 드라마 <첫사랑>(1996) <장밋빛 인생>(2005) <추적자 THE CHASER>(2012, 이하 ‘<추적자>’)에서 맡은 역할만 봐도 각각 누군가의 형,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 등 그 자신 자체로 빛난 적이 없었다. 1991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주로 소시민의 역할을 맡아오며 스타가 아닌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스크린 첫 주연작인 <숨바꼭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두 아이를 둔 아빠로 등장한다.
성수(손현주)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없어 보인다. 고층아파트에 단란한 가정을 이뤘고 시내 중심가에서 멋진 카페를 운영한다. 실종된 형의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그의 삶은 완벽했다. 대신 짐을 빼기 위해 찾아간 형의 집에서 성수는 자신의 아파트 주소가 적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성수는 가족들에게 문단속을 잘 할 것을 알리지만 곧 형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숨바꼭질>은 남의 집에 몰래 숨어사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괴담이지만 실은 집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남다른 집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성공으로 단정 짓는 한국에서 서울의, 강남의, 고층아파트의 로열층은 가장 잘 나가는 사회적 계급을 대변한다. 다만 그와 같은 성공이 모두의 희망사항이 되면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비싼) 집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계급싸움으로 변질됐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성수와 같은 성공한 가장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집을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숨바꼭질>은 귀신이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 대신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극 중 공포의 기원으로 삼는다. 그 때문에 성수의 캐스팅 조건은 ‘소시민적 영웅’이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허정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잘 할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이면서 예민하게 보이는 지점이 있어야 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이를 충족시킬 배우는 딱 한 명뿐이다. 손현주는 부담스럽지 않은 외모(?) 덕에 평범한 인물들을 연기해오다가 최근 들어 소시민적 영웅 이미지로 역할의 확장을 꾀하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추적자>이었다. 2012년 최고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작품에서 그는 뺑소니 사고로 중학생 딸을 잃은 강력계 형사 백홍석으로 등장했다. 그 충격으로 아내까지 잃게 된 백홍석은 딸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기에 이르고 그 끝에서 권력의 핵심과 대면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의 싸움에서 백홍석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건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까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 맞선 눈물겨운 부정(父情)이었다.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백홍석의 모습에서 많은 이들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했다. 가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감내해야 하는 아버지의 쓸쓸한 운명을 말이다. 이는 부와 명성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욕망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흉흉한 세태 속에서 아버지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추적자>를 통해 손현주가 소시민의 영웅으로 각광받게 된 계기이면서 <숨바꼭질>의 성수 역에 캐스팅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숨바꼭질>에서도 성수는 위기를 맞은 가장이면서 동시에 이를 극복해야 하는 아빠이자 남편이다. 성수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어느 한구석에서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건 형을 제치고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까닭이다. 돈이 개입되면 피를 나눈 형제조차 철천지원수로 돌변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한국에서 불현듯 전해진 형의 소식을 접하고 성수가 느꼈을 공포는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자수성가 해 힘들게 일군 자신의 가정과 터전을 행여 형이 해코질 하지는 않을까 불안에 밤잠을 설치는 것이다.
그래서 손현주가 가진 친근한 이미지, 즉 선한 인상은 양가적이다. 성수의 경우처럼 아무리 양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검은 의도가 있었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이에 원한을 가진 형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관객은 손현주의 인상으로부터 성수의 운명을 직감한다. 아니나 달라,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와 달리 성수는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부터 제 한 몸 간수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가족이 위협을 받을 때면 늘 집에 늦게 도착하는 터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일쑤다.
성수와 같은 소시민의 영웅은 소중한 것을 뺏긴 후에야 비로소 행동에 나서고 사건을 해결한 뒤에도 결코 잃은 것을 복원시키지 못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경험이지만 익숙한 인상을 주는 건 성수 뿐 아니라 대다수 힘없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현주는 <숨바꼭질>과 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가 가진 분노를 대리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면서 소시민의 영웅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손현주의 연기에서 묻어나는 페이소스의 정체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이고 괴롭힐지라도 손현주의 소시민 연기는 잠시나마 위로의 순간을 제공한다. 손현주는 그렇게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시사저널
NO. 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