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 기다렸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도쿄 소나타>(2008) 이후 4년 만에 신작 <속죄>를 만들어 부산을 방문했다. 사실 <속죄>는 영화가 아니다. 미나토 카나에의 동명소설을 브라운관 속에 되살린 러닝 타임 300분의 드라마다. 어린 소녀가 살해될 당시 함께 있던 네 친구 각자의 이야기와 이들이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분개하는 살해당한 소녀의 이야기가 총 5부작을 이룬다. 그럼으로써 일본사회의 비극을 수면 위에 드러내고 제목대로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 이 드라마는 영락없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이다.
<도쿄 소나타> 이후 오랜만의 신작이다.
년 동안 굉장히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 준비까지 했었는데 잘 안됐다. <도쿄 소나타> 직후에 미국에서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일본에 불경기가 찾아왔다. 그 때문에 자금이 돌지 않아 영화를 만들기 힘들었을 거라고 위로를 해주는데 정말 그게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웃음)
그럼 <속죄>는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나? 드라마를 만들게 됐다.
시나리오만 쓰고 있다 보면 현장의 감이 둔해져 불안감이 든다. 아무 작품이나 좋으니 현장에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차에 와우와우(WOWOW)방송사에서 <속죄> 제안이 들어왔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갑자기 웬 드라마냐는 거다. 일본에서는 TV드라마 프로듀서가 영화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영화감독이 드라마를 찍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연출에 대해 별 구별을 두지 않는다. 그건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제작비 규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게 큰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와우와우는 일반적인 방송국과 달리 영화도 제작한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와우와우에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더 편한 마음으로 만들었다.
드라마 제안을 받기 전 미나토 카나에의 원작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사실 의뢰를 받고 나서 읽었다. (웃음) 일본에서 워낙 유명한 작가라 그 존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데뷔작인 <고백>도 영화만 보고 소설은 안 읽었다. 다만 소설을 읽고 보니 재미있기는 했지만 연출자의 입장에서 영상으로 옮기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유 때문이었나?
주인공이 모두 여자이고 소설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잘 모르겠더라. 영화는 객관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보여줘야 하는 매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건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또 하나, <속죄>의 발단인 소녀의 살해 사건은 과거에 발생한 것인데 드라마와 같은 영상물로 이와 같은 식의 과거를 다룬다는 게 만만치가 않다. 현재 시점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이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속죄>는 과거에 사건이 발생하고 현재로 돌아가는 구조라 완전히 반대여서 까다로웠다.
연출에 더해 각색을 겸했다. 언급한 부분에 초점을 맞췄나?
소설 속 여자들은 사실 비호감이다. 소설로 읽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꺼려지는 캐릭터들이다.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남자들도 별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여줄지 그 부분을 신경 쓰면서 각색했다. 원작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진행된다. 이들이 좀 더 관객의 공감을 살 수 있게끔 반성하는 모습이 드러날 수 있게 캐릭터에 반영했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드라마의 주인공들, 특히 죽은 소녀의 엄마 아사코가 반성하는 것 같지만 끝내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는 혼란한 모습을 보인다.
이 드라마는 각 화마다 결말이 있고 5화에 앞선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는 최종 결말이 있는 구조다. 사실 5화의 경우, 소설과 상관없이 오리지널 스토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5화에서 최종적으로 속죄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속죄가 말은 쉬어도 실제로 행하기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사람마다 속죄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 또 속죄를 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어려운 속죄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한 번 반성한다고 속죄가 성립하는 걸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속죄는 반성 비슷한 행동을 한 번 행한다고 해서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하는 짐이다. 그런 의미로 결말을 구성했다.
<속죄>의 내용이 남 일 같지 않은 게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아이들을 상대로 한 어른들의 몹쓸 범죄가 도를 더해가고 있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에 빠져있다.
일본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폭행이 비일비재하다. <속죄>가 참 아이러니한 게 친구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전혀 관계없는 남자들을 살해함으로써 속죄한다. 속죄의 도구로써 전락하는 소설 속 남자들을 보면서 이들을 어떻게 캐릭터로 잡아야할지 고민이 많았다. 왜냐면, 소설을 보면 정말 이들은 정말 죽어도 싸다고 할 정도로 끔찍한 인간이다. 다만 나는 좀 더 복합적으로 이들을 만들었다. 과연 이들을 죽이는 것이 진정한 속죄인가 관객이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아이가 살해당하고 폭행당하는 장면이 나오니 만큼 아역 배우들이 연기하기에 힘든 장면이 꽤 많다. 어떻게 이해시키고 촬영했나?
10살 정도 되는 여자 아이들이었다. 잘하는 건 아주 잘하더라. 이해력도 뛰어나서 성인 배우 대하듯 얘기하고 감정 표현에 대해 논의했다. 다만 어려웠던 건 내가 설명한대로,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만 연기하더라. 성인 배우들은 설명을 하면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 실제 촬영 때는 약간 다른 의외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감독의 입장에서 “그래 바로 저거야” 할 정도로 훌륭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 거다. 아이들은 아직 자기 개성이 완전히 굳어져 있지 않다보니 ‘감독님 저 연기 잘 했죠.”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감독의 역량을 드러내 다른 느낌의 연기를 끌어내려 했지만 내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웃음)
그런 일화를 듣다보니 5화에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아이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난죠(카가와 데루유키)가 운영하는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이 모두 하얀 색 옷을 통일해 입고 기계처럼 단체행동을 한다. 난죠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었을 텐데 혹시 기성세대의 지시에만 움직이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은유하려는 의도가 있었나?
거기까지 생각한 건 아니다. (웃음) 하지만 일리 있는 해석이다. 사실 소설에서는 대안학교에 대한 묘사가 딱 한 줄밖에는 없다. 난죠는 이런 대안학교를 운영한다, 이 한 줄을 가지고 상상력을 더해 좀 더 만들어야 했다. 난죠 캐릭터를 만들면서 복잡하고 내면이 꼬여 있고 이상 증세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민 속에서 학교의 모습이 나오다보니 학생들이 정말 이상 집단으로 보인다.
<속죄>에는 아오이 유, 카세 료, 이케와키 치즈루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배우는 카가와 데루유키였다. 그와는 자주 작업을 함께 해왔다. 그런데 역할의 성격이 흥미롭다. <속죄>에서는 악한이고 <도쿄 소나타>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였다. 밝고 긍정적인 역할이 하나도 없다.
듣고 보니 카가와 데루유키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인물로만 다뤄왔다. (웃음) 처음 카가와 데루유키와 작업한 건 <뱀의 길>(1997)이라는 야쿠자 영화에서였다. 여기서도 주변과 전혀 융화하지 못하는 꽉 막힌 인물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매번 역할은 다르지만 소통에서 문제를 보이는 그런 쪽의 인물로만 캐스팅하는 것 같다.
<속죄>도 그렇지만 당신은 매 작품 ‘소통 없음’에 대한 일본의 비극을 드러내왔다. 그건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 역시 당신의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용기가 생긴다. 난 일본 사람이라 한국사회를 잘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 때마다 개인적으로 ‘평소에 이게 문제다’ 일본사회에 대해서 생각하는 부분을 묘사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는 걸 보면 연출자로서 영화를 만들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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