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나는 ‘농구왕’이었다. 93학번인 나는 88, 89학번과 같은 복학생들이 족구에 미쳐있을 때 농구공을 튀기면서 놀았다. 당시 농구와 족구는 대학 내에서 저학생과 고학생을 나누는 남자들만의 기준이기도 했다. 1, 2학년과 같은 신세대들은 농구에 열광했고 군대 제대 후 복학한 3, 4학년생들은 운동화보다 반발력이 더 좋다며 뿌옇게 먼지가 앉은 군화를 신고 네트 위로 축구공을 넘겼다.
농구 하는 신세대와 족구 하는 구세대는 은연중에 서로를 좀 깔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학년 남학생들은 게스 청바지와 나이키의 마이클 조던 농구화가 유행하는 시대에 군대 갔다 온 티를 내는 복학생들의 복장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복학생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신세대들이 얄미웠다. 만화 <슬램덩크>와 TV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인기에 편승해 농구를 하는 녀석들이라고 깔보며 후배들에게 비수를 날렸다. “곧 군대 갈 녀석들이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동기들과 1년 선배들과 농구를 했다. 온종일 했다. 수업을 빼먹고 농구하기 일쑤였다. 타 대학으로 원정 시합을 갔으며 이참에 아예 농구 동아리를 결성해 학교로부터 승인까지 받았다. 수업 대신 농구를 하니 당연히 성적이 좋을 리 없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공부는 2학기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가 2학년부터, 로 바뀌었고 이후로도 학교에서의 우선순위는 공부보다, 연애보다 농구였다.
성적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1, 2학년생들과 다르게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들은 마냥 놀 수만은 없는 처지였던지라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성적도 관리하면서 족구를 즐겼다. 다만 족구를 할 때만큼은 이들도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족구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으로 게임에 몰두했다. 족구 경기 자체보다 경기에 임하는 복학생 형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럴 만도 했다. 매해 2학기면 가을 체육대회가 열리고는 했다. 족구 경기에 참여하는 복학생 형들의 자세란 말 그대로 전투적이었다. 이마에는 빨간 띠를 두르고 청개구리 문양 군복 하의에, 전투화 끈은 왜 또 그렇게 꽉 조였는지! 압권은 구호. “우리 우승하지 못하면 다 죽는 거야” 뭐 이런 식으로 파이팅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작 전부터 살벌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복학생 형들은 목숨도 내놓을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농구하는 나라고 이들과 심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내 체육대회가 4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월드컵도 아니거늘 어느 과와 맞붙게 될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상대 팀이 결정된 후에는 전력 분석을 하며 그에 대항한 맞춤형 전술을 짜는 등 부산을 떨었다. 우승하지 못하거나 경기에 진다고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겠다는 각오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농구가 나의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족구 하는 복학생 형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늙었다고 조롱하고 (그래 봐야 나보다 서너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촌스럽다고 놀려댔어도 (군복은 아니었지만 내가 입은 ‘추리닝’과 ‘난닝구’는 또 어떻고!) 무언가를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통하는 데가 있었다. 경기에 이기면 기쁘고 우승하면 더 기쁘고 패배하면 아쉬울 뿐인 일개 체육대회에 쓸데없는 힘을 낭비한 우리는 자칭 ‘농구왕’이었고 ‘족구왕’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어언 16년,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을 내 청춘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건 장안의 화제 <족구왕>을 봐서다. <족구왕>은 군대 제대 후 학교로 복학한 홍만섭이 교내 족구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한 여정을 다룬 청춘영화였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1999, 면회>를 연출한 김태곤 감독)는 1990년대 후반 학번인 걸로 알고 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대학 생활을 해서인지 당시의 정서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근데 극 중 배경은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 때에는 만섭이 같은 복학생들이 교내에 넘쳐나서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한 마디로 문제적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대학생이 취업에 올인 하며 성적을 관리하고 하나둘 스펙을 쌓아가는 작금의 면학 분위기에서 그깟(?) 축구공 하나에 능력과 시간과 가진 전부를 쏟아 붓고 있다니. 모두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어 벌레 기어가는 소리조차 소음이 될 것 같은 교내에서 만섭이는 시끄럽게 공 튀기는 소리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면학 분위기와는 괴리된 만섭이의 행동이 우스꽝스럽게 비쳤던지 관객들은 상영 내내 허파가 찢어지라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농구왕’ 시절을 떠올리며 만섭이에 감정이입하고 있자니 관객들의 반응이 다소 섭섭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농구가 뭐 그리 대수였다고 대학 시절의 나를 통째로 바쳤는지 심경이 복잡해졌다. 당시 그렇게 농구를 열심히 했다고 누가 알아봐 준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농구로 돈을 번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우(右)뇌로는 영화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좌(左)뇌로는 내 대학 시절을 복기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족구왕>의 만섭이도 수업에서 만난 여학생 안나에 반해 멋있게 족구 하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감동을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나도 그랬다. 특히 체육대회같이 학과 대항전이 있을 때면 선후배와 동기 여학생들이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고 파이팅을 외쳐주고는 했다. 그 목소리에 자극받아 더 멋있게 보이려고 도를 넘어서 뛰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근데 그게 농구를 죽으라고 열심히 한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여학생이 없어도 멤버들이 모이고 농구공과 골대만 있으면 늘 농구를 했다. 농구로 최고가 되려고 했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농구를 뛰어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고 애당초 농구로 대학에 들어온 특기생도 아니었으니까. 그럼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자문하며 영화를 보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 상영관에 있던 모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명대사가 등장했다.
눈으로 영화 보느라, 머릿속으로 내 대학 시절 떠올리느라, 극 중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영어 연극 연습을 위해 강의실에서 만섭과 안나가 함께 <백 투 더 퓨처>를 보던 장면이었을 거다. 안나가 만섭에게 “남들이 싫어하는 족구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는 요지의 질문을 던진다. 그에 대한 만섭의 답변을 정확히 기억한다. 자기도 왜 열심히 족구 하는지를 몰랐던 만섭은 잠시 멍해 있다가 이렇게 얘기한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그 대사를 듣고는 내가, 아니 내 농구왕 시절이 면죄부를 받은 것 같은 안도감에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주가가 반등을 치듯 자부심에 뿌듯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 아니 이 표현은 적확하지가 않다. 대가 없이도 열심히 한다는 것. 그것이 가능할 시기는 대학 시절이 거의 유일할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족구나 농구와 같은 활동은 금새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회사에서도 족구나 농구를 하지만 부서 화합과 같은 목적에 귀속되기 마련이다.
사회에 나오게 되면 무언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매일 같이 회사에 출근해 나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한 달 먹고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고 주말의 휴식은 주중에 일할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목적이 절대적이다. 하물며 회사 단합용 체육대회가 아니더라도 퇴근 후 부러 개인적인 시간을 빼서 헬스클럽을 찾는 이유는 다이어트의 결과로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려는 시도이다. 결과가 모든 과정과 수단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사회가 건강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대학 시절이 한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일 테다. 지금 이 시대의 청춘이 겪는 아픔은 기성세대가 이들에게서 결과 없이 열심히 한다는 것의 가치를 뺏어갔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심히 하는 청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낭비의 의미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라면 바로 청춘의 열정일 것이다. 결과에 대한 강박감이 없으니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다는 것은 청춘의 특권이다.
지금 이 시대의 청춘의 아픔은 기성세대가 결과 지상주의에 함몰되어 결과 없는 노력의 가치를 몰락시킨 환경에 있다. <족구왕>이 추석을 맞아 큰 영화들 틈바구니에서 꾸준한 입소문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어느덧 많은 이들에게서 잊힌 ‘그저 열심히 한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유가 크다.
만섭은 안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경쟁자와의 족구 대회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나는 경쟁자에게로 돌아가고 만섭에게 남은 건 그저 열심히 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일 뿐이다. 결과 지상주의자의 눈에 손에 잡히는 무엇 하나 얻은 것 없는 만섭은 한낱 족구 따위에 미친 말 그대로의 미친놈이고 결과적으로 패배자일 것이다.
근데 ‘우리’는 안다. 그것이 기성세대에 맞서는 우리만의 저항과 반항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만섭이 세상을 바꿀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수를 더 늘림으로써 다양성의 사회,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족구왕과 농구왕이 대학교정을 시끄럽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저 열심히 노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는 친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얘들아, 어서 나와 놀자!
ARENA HOMME
201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