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까지 21일>(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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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종말이 3주 앞으로 다가온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첫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이라면 어떻게든 섹스 파트너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에라, 모르겠다 폭동을 일으켜 그동안 가져보지 못한 고가의 상품을 훔칠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상은 우리가 종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떠올릴 때면 쉽게 머릿속에 그릴만한 클리셰 같은 상황이다.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이 연출한 <세상의 끝까지 21일>에는 이와 같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우리의 예상을 깨는 지구 종말 배경의 영화다.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할 날이 21일 밖에 남지 않았지만 도망간 아내 때문에 기분이 축 쳐져 있는 도지(스티븐 카렐)의 처지만 봐도 그렇다. 주변에서 생의 마지막을 함께 보낼 여자를 소개해준다고 해도 관심이 없던 그에게 옆집에 사는 페니(키이라 나이틀리)가 찾아온다. 지난 3년 간 잘못 배달되었던 도지의 우편물을 건네주기 위해서다. 그 속에 첫사랑의 편지가 섞여 있었고 도지는 이참에 페니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지구 종말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멜로드라마다. 사실 종말은 남녀의 관계이건, 가족에 대한 것이든 사랑을 말하기에 꽤 유용한 배경이다. 왜 지금껏 이런 종류의 영화가 없었는지 의아할 정도인데 다가오는 종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장 뼈저리도록 만드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도지와 페니는 종말을 앞두고 연인과 헤어진 상태다. 이는 절실한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 영화의 영리한 설정이라 할 만하다.

사실 도지와 페니 커플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맺어지기 힘든 커플처럼 보인다. 매사가 신중하지만 소극적인 도지와 늘 적극적이지만 실수가 잦고 덜렁대는 페니의 성향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다. 더군다나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한 중년의 도지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페니는 연인이라기보다 삼촌과 조카뻘에 더 가까워 보이는 사이다. 다만 이들이 공유하는 게 있다면 아픈 가족사가 있다는 것. <세상의 끝까지 21일>이 사려 깊은 건 도지와 페니가 맺어지는 과정이 각자의 가족과의 ‘화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배경은 재난의 스펙터클을 최대한 자제하고 관계의 종말을 은유하는 쪽에 가깝다. 다만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이들을 등장시키되 관계의 복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자고 말한다. 물론 그것이 지구의 종말이 가까이 왔을 때만 해당하는 경우는 아닐 터다. 도지와 페니는 바로 옆집에 위치하고 있지만 지난 3년 동안 서로 인사 한 번 하지 않았을 정도로 관심 없이 지내오던 사이였다. 그들뿐 아니라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접은 채 메마른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감정에 충실해지고 이리저리 재는 것 없이 행동에 나서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은 지구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가져와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어찌됐든 사랑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스피노자가 <세상의 끝까지 21일>을 본다면 사과나무 대신 사랑을 나누자고 말을 바꿀지도 모른다.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최악의 순간에도 유일하게 빛나는 가치이자 최선의 구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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