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칼린이 베이클랜드 가문의 이야기에 매료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분명히 근친상간과 근친살해에 대한 실제 사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베이클랜드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그는 데뷔작인 <졸도>에서 완전범죄를 꿈꾸는 게이커플의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졸도>에서는 게이에 대한 사회의 편견이 만들어낸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살인을 선택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세비지 그레이스>는 상류사회의 비정상적 관계에 대한 고발? 미국 가족관계의 종말?
<세비지 그레이스>는 1972년 런던의 한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사건을 영화화했다. 아들 안토니 베이클랜드(에디 레드메인)가 엄마 바바라 베이클랜드(줄리언 무어)를 부엌에서 식칼로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이 후에 더욱 파장을 일으킨 건 베이클랜드 가문의 비극적 종말에 비정상적인 가족 간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 브룩스 베이클랜드(스티븐 딜레인)는 부인 바바라와 관계가 좋지 못해 늘 밖을 나돌며 젊은 여자를 만나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안토니의 여자 친구와 살림을 차리기까지 한다. 그러는 동안 바바라와 토니의 관계는 모자의 관계를 넘어서고 그들의 일그러진 욕망은 스리섬, 근친상간과 같은 굴절된 섹스 형태로 나타나면서 결국 비극을 초래하고야 만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부모를 증오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났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흘러나오는 토니의 내레이션은 톰 칼린 감독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살인 사건 하나만 가지고 토니를 희대의 살인마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왜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지 가문의 역사를 추적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흡사 에드워드 양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보여준 시선을 연상시킨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에서 벌어진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다뤘다. 에드워드 양은 주인공 소년의 살인을 가족사를 통해 사회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폭력적인 시대의 실체를 보여줬다. 다만 <세비지 그레이스>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 베이클랜드 가문의 사연이 결코 당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가문의 범위에서 한발자국도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 감독의 시선은 오로지 바바라와 토니에만 맞춰져있다. 심지어 브룩스가 최초의 플라스틱을 발명한 리오 베이클랜드의 손자라는 사실을 밝히지도 않는다.
그 결과, 이들에 대한 묘사는 오로지 베이클랜드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럭셔리한 공간과 그들의 화려한 패션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우아한 퇴폐미로 귀결될 뿐이다. ‘잔인하고 우아한’이라는 뜻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세비지 그레이스>의 의도는 상류사회의 껍데기 같은 삶이 빚은 비극적 말로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격적인 살인 이후 토니의 나머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 마지막 장면의 자막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는 시대에 대해 코멘트하려는 목적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를 철저히 외면하는 <세비지 그레이스>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감독 자신조차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만이 명확해질 뿐이다.
톰 칼린은 <세비지 그레이스>에서 전작 <졸도>가 이룬 성과를 스스로 폐기한다.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은 계승했을지언정 그의 영화미학을 돋보이게 했던 사건을 전후한 여파는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비지 그레이스>는 톰 칼린이 아니어도 그 누군가가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찌된 일일까. 가능성은 두 가지다. <졸도>에서 보여줬던 톰 칼린의 재능이 우연이었거나, 혹은 그의 재능을 먹어치운 또 다른 재능이 <세비지 그레이스>에 존재하거나.
아닌 게 아니라, <세비지 그레이스>에서 보여준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영화를 잡아먹는 수준이다. 그녀가 맡은 바바라는 <부기 나이트>에서 17세 어린 청년과 포르노를 찍으면서도 유사 모자 관계를 유지하며 따뜻함을 보여줬던 역할에서 인간미를 쏙 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다. 물과 불처럼 반대되는 역할에서도 전혀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어떤 경지의 수준을 증명한다. 그래서 나는 톰 칼린이 그녀의 연기에 그만 넋을 잃은 나머지 영화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믿고 싶다. 그만큼 <세비지 그레이스>는 <졸도>의 톰 칼린을 생각하면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대신 <세비지 그레이스>는 줄리언 무어의 영화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2009.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