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로 사라진 서부극이 돌아오고 있다. 정통 서부극 설정을 가져와 장르의 외연을 넓히기도 하고, 최소한의 요소만 남겨둔 채 새로운 유형의 서부극을 만들기도 한다. 할리우드만이 아니다. 미국의 장르로만 알려졌던 서부극이 유례없이 세계적인 러시를 이루고 있다. 무엇이 철 지난 서부극을 다시금 불러냈을까? 서부극 부활에 담긴 배경과 징후, 그 양상들을 읽는다.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던 호방한 서부 사나이들의 기개가 다시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가장 미국적이며 고전적인 장르 중 하나인 서부극이 새로운 옷을 입고 속속 출현하고 있다. 사실, 고전 장르의 부활은 최근 할리우드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다. 서부극과 누아르를 접목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를 위시해, 서부극을 변형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갱스터 누아르의 영기를 살려낸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등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후보로 지명된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서부극의 급부상은 단연 눈에 띈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 2편의 서부극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함께 오른 것은 1957년 조지 스티븐슨의 <자이언트>, 윌리엄 와일러의 이후 처음 있는 일. 그 외에도 후보로 지명되지는 못했지만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하 <제시 제임스 암살>), 숀 펜의 <인 투 더 와일드> 등이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서부극의 부활을 현실화하고 있다.
서부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올해 돌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만 볼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199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뉴튼 보이즈>(1998), 이안의 <라이드 위드 데블>(1999) 등 서부극의 명맥을 이어온 전례들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사멸한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이 봇물처럼 쏟아지며 ‘유행’을 형성한 적은 없었다.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 강도>(1903)를 시작으로, 그 기원이 영화의 기원과 거의 일치하는 서부극은 어떤 장르보다 미국의 현실을 적극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박스기사 참조). 특히 신화적인 소우주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의 탄생과 유지, 소멸을 장르 안에서 완벽히 구현한 사례로 평가된다. 미국 문화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체화하며 자연스럽게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장르이기도 하다.
최근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서부극 열기 역시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인 미국식 장르를 받아들여 재창조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 서부극의 전통을 모범적으로 따르면서 주제를 넓히는 게 첫 번째요, 서부극의 배경과 형태를 가져와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가하는 변종 서부극이 두 번째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후자라 할 만하다.
영웅을 위한 서부극은 없다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와 앤드류 도미닉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는 우리가 서부극에 기대하는 요소가 대부분 담겨 있다. 광활한 황야에 깔린 레일 위를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카리스마 넘치는 검은 복장의 무법자가 말에 탄 채 총을 쏘아대며, 독립심 강한 영웅이 법과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를 압박해 들어온다. 격렬한 총격전과 추격전이 벌어지면 술집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 이 광경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스타일 면에서 두 영화의 차이는 뚜렷하다. <3:10 투 유마>가 빠른 전개와 잔인한 폭력을 앞세운다면, <제시 제임스 암살>은 폭력보다 쫓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우울하고 사색적인 정서를 전면에 깔고 있다. 이는 <3:10 투 유마>가 ‘제한된 시간’이라는 설정 안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것에 반해, <제시 제임스 암살>은 오랫동안 계속된 전설의 실체를 밝힌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제임스 맨골드의 영화는 죄수가 된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러셀 크로)와 호송대원 댄 에반스(크리스천 베일)가 72시간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눈다는 이야기. 반면 앤드류 도미닉의 영화는 자신의 우상인 전설의 무법자 제시 제임스(브래드 피트)를 찾아 나선 소심한 남자 로버트 포드(케이시 애플렉)가 비겁하게 그를 암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 진행 방식은 상이하지만, 두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공유하는 지점이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악당인 무법자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전통적인 영웅에 대해서는 치부가 있는 존재로 그리는 것. 아닌 게 아니라, 댄이 벤의 호송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가족 생계를 위한 200달러 때문이다. 몇 푼의 돈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정의를 도모하게 된 상황인 것. <제시 제임스 암살>의 로버트도 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시를 제거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비겁하게 암살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비열한 인물로 비춰진다. 즉 서부극 신화 속 정의로운 영웅의 모습은 해체돼 온데간데없고 그 지위는 악당이 대신 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서부극은 전통적인 선악 구도를 손바닥 뒤집듯 역전시킨다. 이 전복적인 상황 속에서 반(反)영웅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복잡한 심리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대중은 열광하고 문명화된 법은 그를 위협하는 모순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됐다.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정착하지 않고 유랑하는 떠돌이가 되는 것이다.
전복적 설정은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 서부극의 쇠락기에 이 같은 반성이 먼저 있었다. 샘 페킨파는 1960년대 이미 서부가 개척을 위한 모험의 장소가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한 폭력의 세계였음을 폭로했다. 페킨파는 <와일드 번치>(1969) <관계의 종말>(1973) 등 ‘수정주의 서부극’을 통해 신화화된 영웅의 세계가 아닌 무법자들이 지배하는 생경한 서부의 풍경을 보여줬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또한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무법자>(1966)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등에서 고전 미국 서부극에 반기를 들며 비열한 떠돌이 무법자가 들끓는 타락하고 황량한 이탈리아식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을 창시하기도 했다.
다만, 시간은 흘렀고 시대상도 달라진 탓에 당시의 영화들과 <3:10 투 유마> <제시 제임스 암살>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서부의 또 다른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몰살당해 쫓겨난 지 오래고, 백인의 차지가 된 광활한 대지는 문명화의 과정을 통해 배분되고 분양돼 엄청난 숫자의 인구 유입이 이뤄졌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의 배경은 여전히 서부지만, 그 안에서 예전에 감지하지 못했던 꽉 차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제 그곳은 이해관계가 생기고 의견이 난립하면서 여러 상황이 충돌하는 혼란한 공간이 되었다. 선악을 가르는 가치기준이 묘연한 상황에서 영웅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속화된 인간으로 변모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악당도 영웅이 될 수 있는 법. 21세기 서부극은 그 달라진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에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대목이 등장한다. 두 영화 모두 극중 어린 소년 윌리엄(로건 레먼)과 로버트가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와 제시 제임스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이를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영웅을 동경하는 후계자로의 대물림 구도는 고전적 서부극의 전형적인 요소지만, 수정주의 이후의 서부극은 비극적 결말로 완전한 끝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남겨뒀다. 반면 두 영화는 뒤바뀐 영웅 구도가 대물림되는 아이러니를 영속화한다는 점에서 고전기와 수정주의 시기를 통합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익숙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쌓아간 최근 서부극에서 몇 가지 질문을 수정할 필요가 생겼다. 정의란 무엇인가?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영웅과 악당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누구와 손을 잡아야 이익이 될 것인가? 등등.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서부극의 테마를 넓혀가고 있다.
진화를 거듭하는 서부극
<3:10 투 유마> <제시 제임스 암살>과 달리, <노인>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정통 서부극의 요소가 없다. 2편 모두 서부를 무대로 차용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빠른 총 사위를 보여주는 전설의 무법자도, 말을 타고 뒤쫓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도 없다. 시대적 배경도 정통 서부극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노인>은 1980년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대신 두 영화는 트럭을 타고 산소 탱크를 무기 삼아 돈 가방을 쫓거나, 석유로 얻은 이득을 두고 복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등 변종 서부극에 가깝다.
두 영화는 한마디로 모든 걸 손에 넣은 순간 모든 걸 잃게 되는 남자들의 사연이 주를 이룬다. <노인>은 우연히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발견한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가 습관처럼 살인을 즐기는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추격전을 벌이는 설정으로, 보안관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이들을 뒤쫓으면서 급격히 변한 시대상을 한탄한다는 내용.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금을 채취하다 유전을 발견해 부자가 된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자수성가 스토리다. 온갖 역경과 주변의 방해를 이겨내고 모든 걸 얻지만, 가족과 친구 모두 떠나 홀로 남겨진다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밀도 있게 시각화하기 위해 필름 누아르 스타일(빛과 그림자의 선연한 대비, 실루엣 이미지, 극단의 콘트라스트)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이들 영화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A.O. 스콧은 ‘서부 누아르’(western noir)라는 별칭을 붙였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시종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 때문이다. <노인>이 피와 폭력의 순환을 통해 신화의 무대를 무너져가는 세계로 묘사한 것처럼, <데어 윌 비 블러드> 역시 석유 정치학이 주변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 동시대 미국의 문제를 반영한다. 서부극은 신화적 시공간 속에 당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진화를 거듭한 장르였다. 예컨대, <셰인>(1953) <하이 눈>(1952) <서부의 사나이>(1958) 등 1950년대 서부극이 냉전시대의 미국을 반영한다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내일을 향해 쏴라>(1969) <리틀 빅 맨>(1970) 등 1960~70년대 작품들은 베트남전 시기 암울한 그림자가 서려 있다. 코엔 형제, 폴 토머스 앤더슨 등 미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부극을 들고 나온 건 괜한 우연이 아니다. 풀뿌리 하나 찾기 힘든 사막으로 변한 황량한 서부에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팍팍한 사나이들을 몰아놓은 이 영화들은 동시대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경계’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화에 여념이 없는 작금의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가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둔 텍사스-멕시코 국경 사이를 넘나든다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파이프라인 때문에 이웃의 땅을 탐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탐욕을 부각시킨다. 업톤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 Oil!>(1927)을 원작으로 한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석유를 가지고 갖은 수단을 동원, 검은 돈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대립하는 등 석유 획득에 집착하는 섬뜩한 핏빛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입지전적 인물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서부극의 관점에서 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조지 스티븐슨의 <자이언트>(1956)가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을 만났을 때’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필연인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자이언트>의 무대가 됐던 텍사스 마르파(Marfa)에서 촬영했다(폴 토머스 앤더슨은 촬영 도중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극중에선 캘리포니아로 등장한다). 그뿐 아니다. <노인> 역시 마르파를 촬영지로 택했다. 서부 개척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행위였음을 수정주의 서부극이 폭로한 이후, 두 영화는 보다 현실적으로 이에 변주를 가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석유를 통한 영토 확장을 은유한다면, <노인>은 국경 사이에 걸친 돈 가방을 매개로 부조리를 자아내며 코엔식 유머를 선사한다.
이제 종교적이고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공간이 신화의 공간을 대신하게 된 상황에서 현실의 서부는 판타지에서 현실로 내려온, 더욱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인물을 필요로 하게 됐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이전에 접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악마가 등장한다. ‘살인광’ 안톤 쉬거와 ‘석유왕’ 대니얼 플레인뷰가 그 주인공. 쉬거는 동기도 부여하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대니얼은 동기에 철저히 복속된 목적의식 백 퍼센트의 정신적 폭력으로 비뚤어진 인간 욕망의 극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 자신이 서부극의 무대를 지휘하는 시스템처럼 행동하지만 결코 시스템이 될 수는 없다. 기억할 만한 인물은 될지언정 현실에서 박제될 수 없기에 시스템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떠돌이 혹은 고독한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다. 서부극은 현실의 이야기고 곧 시간의 연대기기 때문이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다른 한편으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회고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부극은 새로 정의된 현실 위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들을 앞세워 다시 한 번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화된 서부극
미국의 영화평론가 A.O. 스콧은 지난해 11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웨스턴은 어떻게 살아남았나?’(How the Western was won?)라는 기사를 통해 “서부극은 명사였지만 이제는 형용사가 됐다. 서부극의 이야기와 풍경은 여전하지만 변주하기 쉽고 장르 혼합이 용이해졌다”라고 진단했다. 서부극의 기본 설정은 변하지 않겠지만 시대에 따라 이를 구성하는 요소는 끝없이 변할 수 있다는 것. 스콧은 이에 대한 증거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진 서부극에서 “과거의 로맨스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며 남자들만이 득시글거리는 서부의 황폐함을 지적했다. 또한 “영웅과 악당은 이제 지방보다 도시의 범죄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하위 장르가 세분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면서, 와이오밍이 배경인 <브로큰백 마운틴>은 ‘서부 멜로드라마’(western weepy)로, 알래스카가 무대로 등장하는 <인 투 더 와일드>는 ‘서부 로드무비’(western road picture)라고 정의 내렸다. 그런 관점에서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은 ‘서부극 중의 서부극’(Western westerns)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서부극이 미국을 넘어 글로벌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김지운 감독의 한국판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제작되고 있다. ‘장르 혼합의 연금술사’인 미국의 미이케 다카시가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를, 폴란드의 피오트르 울칸스키가 <썸머 러브>를, 오스트리아의 존 힐콧이 <프로포지션> 등을 발표하는 등 서부극은 전세계적으로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스콧은 “서부극은 미국만의 장르였지만, 이제는 글로벌 스타일이 돼 장르와 모티브의 상호교류를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부극이 미국의 본질을 가리키는 장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계를 넘어 쏟아지고 있는 장르의 확장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필름2.0 375호
(200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