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제국>(Ischeznuvshaya imperiya)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라진 제국>의 첫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커튼으로 빛을 완전히 차단한 어둑한 방에서 젊은 남녀들이 아치스(Archies)의 <Suger Suger>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언뜻 평범한 파티처럼 보이지만 1973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슈거 슈거>는 1969년 미국에서 발매돼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른 곡으로, 우드스탁으로 대변되던 당시 젊은이들의 격렬했던 저항정신과는 철저히 동떨어진 바블 껌(bubble gum) 사운드를 대표하는 곡이었다. 그런 서구의 음악을 은밀하게 즐긴다는 것은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현실도피를 넘어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조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제국>은 젊은 남녀가 벌이는 고전적인 삼각연애의 풍경 위로 붕괴해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굴곡진 현대사를 겹쳐놓고 향수어린 시선으로 지나간 시대를 회고한다. 특히 탈 정치적인 젊은이들의 연애사를 앞세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카렌 샤흐나자로프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심 없는 주인공 세르게이(알렉산더 리아핀)가 관련한 강의 시간에 농담 따먹기로 일관한다든가, 여자 친구 루다(리디야 밀료지나)에게 선물할 롤링 스톤즈 앨범을 구하기 위해 암시장에서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는 단적인 예다. 이에 대해 감독은 “이 영화가 다루는 1970년대 초반의 소비에트 역사는 다른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 시기는 20세기에 출현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당시 스무 살(1952년 생)이었던 나의 경험을 스크린에 재창조하는 건 의무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사라진 제국>은 보잘 것 없는 개인의 평범한 삶에 대한 애정을 우선하지만 그 사이로 역사의 상흔을 언뜻 내비치며 미시적인 삶과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상호 연관을 맺고 있음을 은연중 상기시킨다. 견고해보이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제국의 실체가 모래성으로 판명 났듯 세르게이가 사랑하는 루다 역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존재다. 계속해서 관계가 어긋날수록 세르게이의 얼굴에 나타나는 상실감은 곧 제국의 운명인 셈이다. 그래서 세르게이가 맞닥뜨리는 스무 살 무렵의 연애의 끝, 이를 이겨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고대도시의 황량함은 마침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임을 <사라진 제국>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3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 시점에 과거의 인물들을 다시금 불러 모은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관계지만 기억의 끝자락을 놓지 않는 이들에게서 특별한 시기에 대한 향수와 후회가 엿보인다. 더불어, 과거에 꾸었던 불가능한 꿈을 두고 나누는 이들의 대화에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국가를 넘어선 역사의 화해의 순간이 엿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 영화에는 음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시대에 접근하는 카렌 샤흐나자로프 특유의 방식과 이를 통해 현재 러시아인의 삶의 기원을 추적하는 사려 깊은 통찰력 등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사라진 제국>은 <재즈맨>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샤흐나자로프의 연출 경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증명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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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카탈로그
(2009.3.3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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