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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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2013)은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에 이은 ‘비포’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이 시리즈에는 나름의 공식이란 게 있다. 멋진 유럽의 풍광을 배경으로 나누는 단 하루의 사랑이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쏟아내는 대화 속에 진행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 영화 의미가 천차만별인 것은 9년 주기로 발표되는 시리즈에 맞춰 우리의 주인공들 역시 20대에서 30대로, 30대에서 40대로 나이를 먹는 까닭이다. (더 정확히는 23살에서 32살로, 32살에서 41살로)

기차 속에서 우연히 만나 비엔나에서 사랑을 나눴던 <비포 선라이즈>가 제시와 셀린느 관계의 ‘해 뜰 날'(sunrise)을 보여줬다면 각자 직업을 갖게 된 후 파리에서 만난 <비포 선셋>에서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저녁놀'(sunset)의 느낌처럼 펼쳐졌었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 이제는 쌍둥이 딸을 가진 중년의 부부가 된 이들이 그리스 여행길에서 금슬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어느 순간 관계의 ‘어두운'(midnight) 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목격되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립은 <비포 선라이즈>의 꿈같은 사랑, <비포 선셋>의 오랜만에 재회가 만들어낸 극적인 사랑에 익숙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다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끄집어내어 날카롭게 공격하는 모습이 갑작스러울지언정 뜻밖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제시와 셀린느의 부부 관계에는 관객인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고 숱하게 목격하는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제시와 셀린느의 자식은 쌍둥이 두 딸만이 아니다. (<비포 선셋>에서 이미 언급됐듯) 제시가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13살 먹은 아들이 하나 더 있다. <비포 미드나잇>은 그 아들을 떠나보내며 마음 아파하는 제시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는 이들 부부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해 들어간 인위적인 설정과는 거리가 멀다. <비포 미드나잇>의 시나리오에는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 외에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도 참여해 머리를 맞댔다. 이번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전작인 <비포 선셋>에서부터 이들 셋은 함께 시나리오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즉,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은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인 동시에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리얼’ 사연이 중첩된 셈이다. 그래서 이 두 편의 작품에는 스타가 아닌 ‘자연인’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삶이 가감 없이 반영된다. 배우이면서 소설가인 에단 호크의 이력은 <비포 선셋>에서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증’됐었다.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어 앨범까지 발표했던 줄리 델피는 극 중에서 기타를 치며 자신의 곡을 직접 불렀을 정도다. 그렇다면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실제 부부 사이는 아니지만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각자의 파트너와 결혼생활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과 그에 따른 소회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에단 호크의 경우,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이자 전처였던 우마 서먼과의 사이에 있는 자식과의 관계가 제시에게 투영됐다. 에단 호크와 다르게 여전히 음악가인 남편과 좋은 관계(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다.)를 유지 중인 줄리 델피지만 육아에 전념하느라 작품 활동에 지장을 받았던 그간의 사연이 셀린느에게서 감지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대화에는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과 <비포 선셋>에서의 서로에게 품었던 환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친구들이 두 딸을 맡아주고 멋진 호텔을 잡아준 까닭에 제시와 셀린느는 오랜만에 달콤한 섹스를 꿈꾸지만 가볍게 시작된 자식 이야기는 점점 서로에 대한 불만으로 확장된다. 예컨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이다. “아들 있는 곳으로 이사 가면 어때?”(제시) “두 딸 키우느라 기타 한 번 제대로 치지 못했는데 또 그러라고!”(셀린느) “그렇게 화낼 필요 없잖아?”(제시) “편히 소설이나 쓰는 주제에 내 마음을 아냐고!”(셀린느)

로맨틱한 계획이 산산이 부서져 날카롭게 서로를 겨냥하는 이들의 대화는 한 때 밝게 빛났지만 추락하는 별똥별의 긴 꼬리처럼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이렇게 현실이 어깨를 짓눌러도 이들의 사랑이 변함없는 건 그동안 함께 했던 18년이란 시간과 이를 지탱해주는 비엔나에서의 첫 만남, 파리에서의 재회와 같은 추억 덕분이다. <비포 미드나잇>의 배경으로 그리스가 선택된 것도 이런 의미가 뒷받침 됐을 터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그리스의 풍광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제격인 장소였던 것이다.

삶이란 과거와 현재가 더해져 미래를 담보하는 법이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보게 되는 현실의 그림자도 결국 우리의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태도는 삶에 대한 관조다. 이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자신들의 사생활을 영화의 재료로 제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에단 호크는 “이 시리즈는 18년이 걸렸다. 그만큼 우리도 성숙해졌다.”고 소회를 밝혔다. 줄리 델피도 다르지 않다. “청춘이 사라지고 30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우울하지는 않다. 20대와 30대를 살았듯 지금 40대를 살고 있다.”

9년이 더 지난 2022년에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아니 제시와 셀린느의 인생을 공유할 수 있을까. 제작진은 <비포 미드나잇>을 끝으로 더 이상의 시리즈는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그게 어디 그들 마음 같을까. 제시와 셀린느가 증명했듯 삶에는 워낙 변수가 많은데다가 이 시리즈가 지속되길 원하는 팬들도 많으니 가능성을 믿어볼 만도 하다. 그럼 제목은 ‘인생의 황혼’이란 뜻에서 <비포 던 Before Dawn> 혹은 <비포 데이브레이크 Before Daybreak>가 어울릴 것 같다.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나서도 제시와 셀린느의 삶이 어떻게 될지 여전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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