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터>(The Vis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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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리처드 젠킨스)의 삶은 단조롭다. 20년째 교수직을 유지할 만큼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지만 강의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만큼 변화가 없는 것이다. 취미가 있다면 단 하나,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 그런 월터의 시계추 같은 삶에 균열이 생긴다.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을 갈 일이 생겨 오래 전 마련해 두었던 뉴욕 집에 들어가니, 이게 웬걸,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네갈에서 불법 이주한 타렉(하즈 슬레이맨)과 자이납(다네이 제케세이 거리라) 커플이 바로 그들. 월터는 이들을 쫓아내려 하지만 타렉의 젬베를 보고는 흥미를 느낀다.

그렇다, 톰 맥카시 감독의 <비지터>는 인종이 서로 다른 이들이 음악과 같은 문화를 매개로 하나가 되는 영화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사실 <비지터>가 처음은 아니다. 조 라이트의 <솔로이스트>(2009)도 백인 저널리스트와 흑인 천재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통해 우정을 나누는 사연이 아니었던가. 장르를 공유하지만 <비지터>가 좀 다른 이유는 음악을 매개로 놓지만 오히려 월터와 타렉의 관계에 방점을 찍기 때문이다. 인종끼리 화합하고 타인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불법 이주민 문제가 현실에서는 영화가 제시하는 환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다인종, 다문화가 긍정적인 기운을 발산하던 뉴욕의 또 다른 모습을 <비지터>에서 목격할 수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콧대 높은 마천루와 타임스 스퀘어의 오색 창연한 광고판 세례 대신 오래되고 지저분한 지하철역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나 후미진 거리에서 불법 좌판을 벌이고 있는 이주민 노점상들이 또 하나의 뉴욕의 풍경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이를 묘사하는 데 있어 거기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로 가득한 뉴욕이니만큼 불법 이주민이라 할지라도 구성원으로써 인정해주자는 배려의 태도가 <비지터>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려에는 어떤 전제가 따른다. 풍요로운 백인이 가진 것 없는 흑인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베푸는 식의 갑 싼 동정심이 아닌 서로의 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친구로서의 우정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려의 정체다. 월터가 타랍에게 집과 음식을 제공하면 타랍은 월터에게 젬베를 가르쳐주는 식으로 이들은 점점 서로를 친구 이상의 관계로 엮어간다. 결국 <비지터>라는 제목의 ‘방문객’은 월터와 타랍의 관계에 가해진 미국 사회의 방해, 그러니까 타랍의 추방으로 야기될 이들 사이의 불안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월터와 타랍의 관계는 영원히 끝을 보고 마는 것인가.  
타랍이 구속되면서 월터에게 찾아오는 또 한 명의 방문객은 다름 아닌 타랍의 엄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월터와 타랍의 엄마는 각자의 배우자를 잃은 지 오래다. 이를 빌미로 이들은 서로에게 위안과 안식이 되고 타랍과는 끊어지지 않는 관계로 묶이니, 이야말로 <비지터>에서 음악이 힘을 갖는 지점이다. 음악은 리듬을 통해 별개의 요소를 하나로 묶어주고 조화를 이뤄 궁극엔 감동을 주는 매체다. 월터가 타랍에게, 그리고 타랍의 엄마에게 선이 닿으며 관계의 리듬을 만들어 유사가족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비지터>에서 음악은 귀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성질의 것이다. 마지막 순간, 역사 안에 자리 잡은 월터가 타랍의 젬베를 연주하는 모습에서 음악영화가 아닌 ‘가족영화’의 감동이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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