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달리아>(The Black Dahlia)


사용자 삽입 이미지살인으로 인한 죽음은 단순히 사람의 숨이 멎었다는 사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生)의 유통기한을 다한 결과는 싸늘한 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블랙달리아>에서 입술이 양쪽으로 찢어지고 몸뚱이가 두 동강 난 채 내장이 깨끗하게 적출된 시체는 이 세상을 규정할 열쇠로써 또 다른 삶을 연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있는 것들을 증거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섬뜩하게 전시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를 밝혀내는 건 열쇠를 손에 쥔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1987년에 발표된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 <블랙달리아>는 미국의 가장 충격적인 살인으로 기록된 ‘블랙달리아’ 사건을 소재로 당대의 사회를 치밀하게 읽어낸 하드보일드 소설의 걸작이다. 1947년 1월 15일 아침 LA 근교에서 발견된 젊은 여자, 검은 옷을 입고 포르노 필름에 등장했다 하여 일명 ‘블랙달리아’로 불리게 된 그녀 엘리자베스 쇼트의 죽음을 수사하는 두 수사관을 통해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LA, 이 도시로 대표되는 전후 미국의 혼란을 치밀하게 읽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카페이스>(1983), <언터처블>(1987), <칼리토>(1993) 등의 범죄영화를 통해 타락한 시대적 징후를 탐구하는 데 일가견을 보여 온 브라이언 드 팔마가 <팜므 파탈>(2002) 이후 차기작으로 이를 영화화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특히 극중 ‘불과 얼음’으로 불리는 LA의 유능한 수사관 버키와 리가 ‘블랙달리아’ 사건에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천착해온 드 팔마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어릴 적 납치돼 마약에 중독된 채 시체로 발견된 여동생의 모습과 블랙달리아를 동일시하는 리의 모습, 블랙달리아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매들린에게 마음이 쏠려 있는 버키의 모습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1958)에서 매들린(킴 노박)에 집착하는 형사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의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 증세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버키와 리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주변인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무려 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이야기가 된 소설의 구조와 달리, 영화는 드 팔마의 장기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버키와 리, 케이와 매들린 네 명에게 집중해 2시간의 이야기로 축소됐다.

그중 버키와 리, 케이의 미묘한 삼각관계는 <블랙달리아>의 주제에 접근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들 셋의 관계, 즉 두 남자 모두 케이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버키와 리의 사랑을 포용하는 관계 설정은 ‘파멸’이 아닌 ‘공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장르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블랙달리아 사건’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가해지자 각자가 숨기고 있는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서서히 붕괴시키고, 결국 그 빈틈을 파고드는 건 LA의 추악한 이면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 해결방식은 증거를 통한 ‘추리’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쇼트와 관계된 사람은 물론 이를 수사하는 형사까지, 영화는 모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파고든다. 결국 블랙달리아 사건의 전모는 우연으로 점철돼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우연의 끝이 할리우드의 거물급 인사와 LA 형사에게 이어져 있다면, 이는 사실상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그만큼 LA의 부패는 도시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LA의 혼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략적으로 꿈을 파는 이미지를 선전해온 미국의 타락한 이면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다.


드 팔마는 인물간의 관계를 통해 도시의 이면을 읽어내는 한편, 도시에 대한 묘사를 전면에 드러내 당대의 비릿한 공기를 포착한다. 그런데 여기엔 원칙이 있다.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먼트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앞에 두고도 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갖는 태도로 일관한다. 가령,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이를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축이 되는 건물을 가운데 두고 마약범을 체포하는 버키와 리를 보여준 뒤 그 건물을 넘어 블랙달리아 사건의 시작을 포착한다. 시체 주변으로 펼쳐진 배경에서부터 이야기가 번져오고, 카메라는 도시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부터 살인사건의 이미지를 찾아나간다. 영화 <블랙달리아>의 이런 태도는 원작에 의지한 바가 크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은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사회의 이면을 읽어내는 소설의 화법 자체는 그대로 보존한다.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대폭 축소했을지언정 화법과 주제에 있어서는 큰 변화를 기하지 않으면서 연출의 안정화를 꾀하려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블랙달리아>는 그의 신작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좀 심심한 면이 없지 않다. 드 팔마 감독 특유의 복잡한 미스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듯 유영하는 이미지는 원작의 방대함과 누아르라는 장르가 지닌 이미지의 클리셰에 갇혀 힘을 잃고 만다. 브라이언 드 팔마 이전 <블랙달리아>의 영화화에 뛰어들었던 데이비드 핀처는 3시간 버전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을 매달린 끝에 포기를 선언했고 미국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살인 이야기 <조디악>(2007)을 내놓기도 했다. 그만큼 <블랙달리아>가 품고 있는 충격파는 단 몇 시간에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여전히 할리우드에는 엘리자베스 쇼트처럼 배우의 꿈을 안고 영혼을 팔며 살아가는 ‘블랙달리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고 미국은 이들의 타락을 자본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블랙달리아>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은 그 무엇도 명쾌히 해결되지 않는 지독한 무력감의 세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필름2.0 359호
(2007. 10. 30)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