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레거시>(The Bourne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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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본이 등장하지 않는 <본> 시리즈가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이전 세 편의 작품과 어떻게 연관을 맺으면서 동시에 차별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본> 시리즈의 4편 <본 레거시>의 연출을 맡은 이가 바로 ‘토니 길로이’다. 토니 길로이의 경력은 말 그대로 화려하다.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의 작가로 참여했었고 <마이클 클레이튼>(2007) <더블 스파이>(2009)를 연출하며 감독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본 레거시> 제작진이 원하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적임의 연출자였던 셈이다.

연출과 각본을 모두 맡은 토니 길로이는 <본 레거시>의 의도에 대해 “전작들의 유산(legacy)을 염두에 두면서 더욱 거대한 음모를 통해 다른 영화인양 구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의도를 반영하듯 영화는 극 초반부터 제이슨 본이 뉴욕에 침투해 CIA를 혼란에 빠뜨리는 <본 얼티메이텀>의 상황과 새로운 주인공 애론 크로스(제레미 레너)가 알래스카에서 생존훈련을 받는 모습을 교차로 편집해 보여준다. 그렇다고 오해 마시길! 제이슨 본을 연기한 맷 데이먼은 <본 레거시>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진으로만 모습을 비칠 뿐이다. 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본이 트레드스톤의 비밀을 밝히고자 뉴욕을 동분서주하는 그 시각, 미 국방부는 수뇌부 회의를 갖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국방부 역시 CIA의 트레드스톤처럼 슈퍼 요원 양성 프로그램 ‘아웃컴’을 운영하던 까닭이다. 육체적인 능력은 최대화하고 양심의 가책은 최소화하기 위해 약물실험까지 병행하던 차 외부로 밝혀질 것을 우려, 책임자 에릭 바이어(에드워드 노튼)에게 아웃컴의 폐기를 지시한다. 각국으로 퍼져있던 실험대상자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는 가운데 애론 크로스는 훈련 중 약이 떨어지면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크로스는 자신을 검진했던 연구원 마르타 셔링(레이첼 바이스)을 찾아간다.    

애론 크로스는 제이슨 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지만 국가의 제도화된 폭력 프로그램에서 제거되지 않는, 급기야 시스템을 공격하는 ‘버그’와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한 배를 탄 인물이다. 국가 안보를 위해 충성했으나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처지로 전락한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회의를 품은 크로스와 본은 과거에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병기였지만 이제는 그 시스템을 교란하고 전복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시스템의 당사자인 CIA와 국방부는 당황하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이 역전의 상황이 주는 재미야말로 <본> 시리즈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무시무시한 인간병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걸까? 전작의 <본> 시리즈에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속 시원히 밝히지 않은 내용이라면 이것일 테다. 이는 토니 길로이가 거대한 음모라고 지칭한, 전작과 차별되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애론 크로스의 본명은 케네스 킷섬. 참전 중 에릭 바이어의 권유로 아웃컴 프로그램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후 마르타에게서 지속적인 약물 투여를 받는다. 그동안 킷섬은 전사자로 처리되어 관련한 모든 정보가 삭제되고 애론 크로스라는 최정예요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과정을 다루는 토니 길로이의 연출력은 ‘세뇌’를 소재로 한 정치스릴러의 대표작 <맨츄리안 캔디데이트>(1962)를 연상시킨다.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국가로부터 세뇌당한 군인이 안보와 직결된 임무에 나선다는 설정으로 관심을 모았다. 당시 미국이 처한 냉전, 그리고 매카시즘과 결부되면서 풍자영화로 기능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 (이 때문에 이미지 추락을 염려한 출연자 중 한 명인 프랭크 시나트라는 판권을 사들여 개봉을 막기도 했다!) 토니 길로이는 전작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구축한 핸드 헬드와 빠른 편집 대신 플래시백과 교차 편집 등 <맨츄리안 캔디데이트>의 고전적인 방식을 이어받아 설명조의 연출을 통해 나름 차별을 꾀한다.

이는 애론 크로스와 마르타 셔링의 관계 묘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덕 라이먼이 메가폰을 잡았던 <본 아이덴티티>를 제외하면 폴 그린그래스는 본의 애정 관계만큼은 철저히 무시한 채 CIA를 상대로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만 주력했다. 그에 반해 <본 레거시>의 크로스와 셔링은 쫓기는 가운데 수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서로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국가로부터 말 못할 고초를 겪은 이들에게 감독이 선사하는 치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에릭 바이어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린 크로스와 셔링이 배를 타고 한적한 섬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전적인 낭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폴 그린그래스는 맷 데이먼의 출연만 보장되면 4편의 연출도 맡을 예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4편의 제목을 ‘본 리던던시 The Bourne Redundancy’, 즉 ‘여분의 본 시리즈’라고 우스갯소리처럼 흘리기도 했다. 대신 폴 그린그래스는 <본 레거시>에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자문의 위치로 물러나 (서울 장면 촬영 당시 내한하기도 했다.) 토니 길로이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본> 시리즈의 전매특허로 굳어진 거리 액션신이다. 확실히 필리핀 마닐라를 무대로 셔링을 뒤에 태운 채 크로스가 펼치는 오토바이 추격신은 이 프랜차이즈가 왜 액션의 ‘갑’으로 통하는지를 증명한다.

그럼 <본 레거시>는 이후의 시리즈를 예고하는가? 토니 길로이는 “후속편은 염두에 두지 않고 연출에 임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도 <본 레거시>는 전작과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 사이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폴 그린그래스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느냐, 새로 연출을 맡은 토니 길로이의 개성을 확실히 하느냐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기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작사가 희대의 프랜차이즈를 포기할 리 만무하지만 후속편이 기획된다면 양자의 노선 사이에서 하나를 확실히 정해야 롱런이 보장될 듯싶다. <본 레거시>는 이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펼치는 것이다.

movieweek
NO.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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