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앨리스, 할리우드 액션물의 역사를 다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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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자신들의 실제 주적을 악당삼은 액션물을 통해 전 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해왔다. 예컨대, <람보2>(1985)에서는 베트남 포로수용소에 갇힌 미국병사를 구하기 위해 ‘월남전’ 참전군인 출신의 람보(실베스터 스탤론)가 투입됐고,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활약을 담은 <탑건>(1986)에서는 국가 이름이 명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의 제트기가 ‘구(舊)소련’제였다는 점에서 영화가 노리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트루 라이즈>(1994)와 같은 영화를 통해 ‘아랍’의 테러리스트가 베트남과 러시아가 떠난 적의 빈자리를 채웠다.

9.11을 전후해 미국의 승리로 이라크전이 종식되고 오사마 빈 라덴마저 제거되면서 할리우드는 액션물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던 그럴싸한 악당을 잃고 말았다. 혈혈단신 이들에 맞서 하드바디(Hard Body)를 뽐내던 람보, 코만도, 존 맥클레인(<다이 하드>) 같은 이들은 이제 한물간 존재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는 이 장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했다. 하여 2000년대 들어 할리우드에 가장 큰 지각변동을 일으킨 장르를 꼽자면 단연 액션물이다. 기존의 하드바디들과는 철저하게 안녕을 고한 새로운 유형의 ‘병기’들이 주요한 캐릭터로 급부상한 것이다. 다름 아닌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맷 데이먼)과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앨리스(밀라 요보비치)다.

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 액션 캐릭터이지만 의외로 공유하는 바가 많다. 우선 본과 앨리스가 모두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본 아이덴티티>(2002)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를 표류하다 어부들에게 구출된 본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인간 병기가 되었는지, 왜 쫓기는 신세가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건 <레지던트 이블>(2002)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지금 막 깨어난 그녀 눈에 비친 세상은 말 그대로 좀비 천지다. 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와중에 자신은 왜 정신을 잃었는지, 위기의 순간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자신의 정체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그것은 적을 잃고, 그럼으로써 목표 의식을 상실한 할리우드의 액션물이 처한 상황을 본과 앨리스의 기억상실에 투사하는 결정적인 설정이라 할 만하다. 바꿔 말해, 과거에 누렸던 장르의 영광을 지워버리고 전혀 새로운 요소들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결국 본과 앨리스의 궁극적인 임무는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올라가되 그 과정에서 2000년대에 어울릴법한 액션 캐릭터의 상(像)을 정립하는 것이다. 하여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육체적인 조건이나 사건을 해결해가는 방식까지 과거의 액션 영웅들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한다.

사실 맷 데이먼과 밀라 요보비치는 2000년대 이전이었다면 액션물이 거들떠보지 않을 육체와 외모를 지녔다. 실베스터 스탤론, 아놀드 슈워제네거, 브루스 윌리스처럼 올록볼록 근육을 기르기는커녕 아저씨(원빈의 <아저씨>를 말하는 게 아니다!) 특유의 물렁살을 연상시키는 맷 데이먼의 덩치는 하드바디라고 부르기 망설여진다. 밀라 요보비치는 어떤가. 리들리 스콧이 <에이리언>(1979)을 만들 당시 남성적인 골격을 지닌 여자를 원해 시고니 위버를 리플리 역에 캐스팅한 것을 감안하며 여성적인 외모가 극대화된 밀라 요보비치의 앨리스는 새로운 유형의 여전사라 할 만하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건장한 몸과 육중한 화기를 앞세우기보다는 머리를 쓰거나 도구를 활용하는 등의 지능형 전사에 가깝다.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코만도나 무식(?)하게 맨 몸으로 적과 맞서는 존 맥클레인과 달리 본은 수건으로 팔을 감싸 나이프 공격을 막고 손에 잡히는 책 등으로 상대방의 목을 가격, 치명상을 입히는 쪽을 택한다. 앨리스의 경우, 시리즈를 더할수록 무기 활용도가 현저히 높아졌지만 <레지던트 이블>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했던 그물 레이저 공격을 잘 빠진 몸매로 빠져나가든가, 잘 보이지 않던 통풍구를 찾아 몸을 숨기는 등의 똑 부러지는 면모를 과시하는 것이다.

이런 활약상에도 불구, 히어로라는 칭호 앞에 ‘안티 anti’를 붙여 본과 앨리스를 반(反)영웅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맞서야 할 상대가 다름 아닌 그들의 탄생을 주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본은 CIA가 비밀리에 운영하던 암살단의 최정예요원이었고, 앨리스는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린 엄브렐러사(社)가 유전자 조작으로 키운 인간병기였다. 허나 CIA는 기억을 잃은 본이 자신들의 비밀을 폭로할까봐, 엄브렐러는 예상 밖으로 강한 힘을 과시하는 앨리스가 자신들을 압박해오니,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에 최초의 임무를 망각하고 본의 아니게 살부(殺父)를 행할 수밖에 없는 본과 앨리스는, 그래서 고전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본과 앨리스는 국가 혹은 기업의 제도화된 폭력이라는 원죄의 부스러기다. 국가를 위해, 기업을 위해 충성했으나 지금은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처지로 전락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 회의를 품은 본과 앨리스는 과거에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병기였지만 이제는 그 시스템을 교란하고 전복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본’과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쾌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었던 본과 앨리스가 역으로 감시와 통제의 주체가 되자 시스템은 당황하며 혼란에 빠진다. 이 역전의 상황이 주는 재미야말로 <본>과 <레지던트 이블>이 시리즈로 순항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다.      

<본> 시리즈의 4편 격인 <본 레거시>와 <레지던트 이블 5-최후의 심판 3D>의 9월 개봉이 확정됐다. <본 레거시>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흥행세에 밀려 개봉을 9월로 연기했지만 맷 데이먼을 대신한 제레미 레너가 합류,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으로 시리즈의 강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레지던트 이블 5>는 앨리스와 엄브렐러사의 최후의 대결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지금 할리우드의 액션물은 본과 앨리스에 의해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중이다.


VOGUE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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