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Boy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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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장기전에 능한 감독이다. <비포 선라이즈>(1995)를 필두로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으로 이어진 ‘비포’ 시리즈는 혈기 왕성한 20대였던 제시와 셀린느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가득했던 30대에서 쌍둥이 딸을 가진 중년의 부부로 성장하는 40대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지켜봐 온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10대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든다면 어떤 형태가 될까. 그렇다, 나는 지금 링클레이터의 신작 <보이후드> 얘기를 하려고 한다. <보이후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여섯 살 소년 엘라 콜트레인을 캐스팅해 성장 과정을 그대로 ‘기록’한 작품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 동안 동일 배우들과 매년 만나 15분 정도 분량을 촬영하며 <보이후드>를 완성했다.

시간이라는 형식

<보이후드>는 여섯 살 소년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이 열여덟 살 성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 여정이 12개의 시퀀스로 제시되는데 링클레이터는 1년의 기간을 구분점 삼아 12년의 세월을 담아냈다. 단순히 영화라기보다는 시간을 형식 삼은 개인적인 역사라는 인상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드라마가 곧 역사인 셈이다.

요컨대, <보이후드>는 메이슨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메이슨 가족의 역사다. 이 영화에는 메이슨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 뿐 아니라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 출연하는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케이트, 그리고 극 중 메이슨의 누나로 등장하는 사만다 역의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실제 딸이기도 하다!)의 12년의 실제 성장 과정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시간은 강물이어서 나를 휩쓸어 가지만, 내가 곧 강이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평론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시간과 함께 성장하고 인생은 시간으로 인해 지속한다. 그러니까, <보이후드>의 형식은 시간 그 자체다. 성장을 이야기한 작품은 많았지만, 이 영화처럼 성장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설득한 영화는 단언컨대, 없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라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드와넬 연작’을 들 수 있다. 총 5부작 구성으로, <400번의 구타>(1959)에서 13세 소년 앙투안을 연기한 장 피에르 레오는 이후 <앙투안과 콜레트>(1962) <도둑맞은 키스>(1968) <부부의 거처>(1970) <사랑의 도피>(1979)까지, 사랑을 경험하고 결혼에 골인한다. 트뤼포 감독은 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앙투안의 성장 과정을 장 피에르 레오의 20년의 세월을 통해 지켜본 것이다.

영화와 영화 사이 최소 3년에서 최대 9년까지 공백을 두고 있는 ‘앙투안 드와넬 연작’과 다르게 <보이후드>는 그 과정을 한 편의 영화로 다룬다. 결혼을 포함하지 않지만, 메이슨이 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까지가 <보이후드>가 다루는 성장이다. ‘앙투안 드와네 연작’이 사랑과 결혼 같은 특별한 사건으로 성장을 이벤트처럼 드라마투르기 한다면 <보이후드>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일상의 작은 순간들로 성장을 기록하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드라마

일상은 우리가 추억하고 향수하는 것과 다르게 그렇게 재미있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3시간에 달하는 <보이후드> 역시 12년의 세월을 담아냈다는 특별한 제작 과정과는 별개로 잔잔하게 진행된다. 메이슨의 삶에 사건이라 부를 만한 특별한 경험이 없다는 게 아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이혼한 탓에 이사가 잦았고 그에 인해 낯선 도시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엄마의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혼란을 느낄 법도 하지만 다행히 일주일에 한 번씩 누나와 함께 헤어진 아빠와 만나면서 대화를 통해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여러 가지다. 아빠와 엄마가 어떻게 만나 사랑을 나눴는지에 대해서부터 메이슨이 처음 만난 여자 친구와의 사랑과 실연까지, 우리 또한 성장기에 겪었을 법한 경험 대부분에 대해 부자(父子)는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영화는 메이슨이 겪는 경험을 다양하게 묘사하되 특정 사건에만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는 식의 영화적 장치를 삼간다. 오히려 각각의 경험들을 비슷한 비중으로 소개하는데 이런 식이다. 술을 좋아하는 새아빠는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급기야 메이슨과 누나와 엄마는 탈출을 감행한다. 그 때문에 전학 가는 문제로 메이슨과 사만다는 엄마와 갈등을 겪지만, 다음 시퀀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남매는 오바마를 지지하는 아빠를 따라 선거 활동을 하는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그 순간만큼은 특별했겠지만, 후에 인생을 반추할 때 우리가 겪은 각각의 경험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미 지나가버린, 그래서 기억 속 비슷한 비중과 자리를 차지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라면 문제가 달라지지만 <보이후드>가 묘사하는 일련의 성장은 메이슨의 것이면서 또한 우리가 모두 겪은 사건이기도 하다. 거기에 누구 경험이 특별했으며 누구의 성장은 하찮았다는 식의 평가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와 관련, 누나에 이어 대학에 입학한 메이슨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는 별안간 울음을 터뜨려 아들을 당황케 한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또한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건만 자식을 독립시키며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을 어느 정도 마치려 보니 얼마나 허무한지 모르겠다는 요지의 얘기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정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 각자의 삶을 경험하지만, 성장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공통으로 거친다. 성장이란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양가의 행위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의 독립이라는 경이의 순간에 한편으로 허무한 감정을 느낀 것일 테다.  

나의 기록, 우리의 역사

그렇기에 <보이후드>는 잔잔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음미할 구석을 제공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보이후드>는 메이슨 개인의 기록이자 우리 모두의 역사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메이슨이라는 특별한 인물에 주목하지만, 그리고 링클레이터 감독은 “어린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보이후드>가 보여주는 성장은 또한 모두 겪은 것이기에 우리는 그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덧씌우거나 보충할 말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오프닝 장면도 이를 자연스럽게 은유한다. 콜드플레이의 ‘Yellow’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섯 살 메이슨은 풀밭에 누워 위를 응시하고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새파랗고 광활한 하늘을 비춘다. 누구라도 고개를 들면 메이슨이 쳐다보는 것처럼 하늘을 보게 된다. 성장은 모두에게 하늘과 같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하늘을 보고 떠올리는 바가 각자 다른 것처럼 성장에 대한 개인의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보이후드>는 메이슨를 중심에 놓지만, 메이슨의 아빠와 엄마와 누나의 성장도 주변에 배치해 놓는다. 특히 메이슨의 부모는 육체적으로는 성장했음에도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까닭에 메이슨이 경험한 것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변화를 겪는다. 물론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다. 메이슨의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에 모인 메이슨 가족은 12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엄마는 이혼과 재혼으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과거와 다르게 엄마로서, 대학교수로서 이제는 안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재혼과 함께 또 다른 자식을 갖게 된 아빠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비로소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성장한 모습이다. 시간이 이들을 무르익은 인간으로 만든 것처럼 영화 역시 12년의 제작 과정을 통해 12년산의 포도주처럼 숙성되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시간의 흐름 그 자체만으로 좋지 않았던 영화가 좋아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간을 품고 있는 이 영화가 관객과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이라는 공통 사로 소통하고 호흡할 수 있다는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듯 흩어진 개인이라는 물방울이 이 영화를 통해 모여 강을 이루고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보이후드>는 성장을 언급할 때면 계속해서 회자하고 공유될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맥스무비
(201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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