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울프>(Beowulf)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문학 작품으로 알려진 <베오울프>는 게르만족의 영웅 ‘베오울프’의 일대기를 담은 대서사시다.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을 전면에 내세운 까닭에 유럽 전역에서 보편성을 얻은 이야기는 영웅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시대가 바라보는 영웅의 가치도 변하는 법.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스타더스트>의 작가 닐 게이먼과 로저 애버리를 끌어들여 의미가 전혀 다른 <베오울프>를 탄생시켰다. 인간과 괴물이 대결한다는 원작의 큰 줄기는 유지하되 선악구조를 희미하게 설정함으로써 현대적인 영웅상을 제시한 것이다. 닐 게이먼과 로저 애버리는 각색 작업에도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곧 이를 소설로 출간할 예정이다.

<베오울프>는 베오울프가 괴물 그렌델을 처단하는 전반부와 드래곤과 맞서는 후반부가 극명히 갈리는 구조로 돼 있다. 두 전투 사이에 생긴 50여 년의 시간차를 이용, 베오울프의 활약상을 전시한 후 영웅신화가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를 통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현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판타지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미국이 지금껏 옹호해온 영웅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우회적으로 고발하는 것. 그러나 이를 눈치 채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도덕적으로 흠잡을 것 없는 신화로서 영웅을 부각시킨 전반부가 지나고 나면 그 이면에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음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장치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렌델 처단 이후 베오울프가 가져온 평화로운 세상을 묘사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악과의 공조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물의 마녀로 등장하는 안젤리나 졸리의 출연 장면은 손에 꼽힐 정도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마녀가 베오울프와 손잡고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 악이기 때문이다.

베오울프가 그렌델을 처단한 후 형성하는 가계도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물의 마녀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 괴물로 묘사되고 성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괴물, 즉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자신이 키운 악으로 위기에 처한다는 설정은 흡사 세계 영웅을 자처하는 미국이 처한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그런 혐의를 역으로 이용해 논란을 일으켰던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은 <베오울프>와 흥미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렌델과의 전투에서 보이는 베오울프의 전사적 풍모가 <300>의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군의 기를 북돋우려 “I am Beowulf!”라고 외치는 모습은 “This is Spartans!”를 부르짖었던 레오니다스의 패러디라 해도 틀리지 않다. 영웅신화를 해체하는 작품인 만큼 노골적으로 영웅을 신화화하는 <300>은 <베오울프>에게 그 허구성을 까발릴 좋은 텍스트였던 셈이다. 두 영화의 결말이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정반대인 건 그런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에 주목한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영웅의 면모를 거부하는 베오울프의 행동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임에 틀림없다. 물의 마녀와 만난 후부터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물론, 자신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자신의 권능을 귀찮아하며 부정하고 심지어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정도다. 이는 최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에서도 발견되는 징후로, 9.11 이후 미국의 자존심과 다를 바 없었던 독보적인 영웅의 가치가 과거 같지 않음을 반영하는 실례다.

<포레스트 검프>(1994), <콘택트>(1997), <캐스트 어웨이>(2000) 등 미국의 보수주의적 가치를 간접적으로 옹호해온 로버트 저메키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베오울프>는 의외다. 특히 그런 악의 고리가 되풀이될 것임을 암시하는 결말부를 접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의 가치 훼손에 대한 풍자적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질적인 영화도 아닌 셈이다. 오히려 저메키스의 손길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폴라 익스프레스>(2004) 이후 그가 일관되게 관심을 쏟고 있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다.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퍼포먼스 캡션’을 선보였다면, <베오울프>에서는 안구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하는 ‘EOG’(Electrooculogram) 기술을 구축했다. 사실적인 비주얼과 달리 눈의 움직임이 전혀 없어 감정 구현에 실패했던 전작의 약점을 보완했다. EOG는 표정과 몸의 움직임을 캡처하는 동시에 눈과 눈꺼풀 근육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어 베오울프의 감정 변화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영화의 핵심 기술이었다.

비주얼은 확실히 압도적이다. 규모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표정에 있어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3D 버전이 동시개봉을 기다리고 있어 더 배가된 스케일과 현실감을 느낄 수 있을 터. 관객의 몰입을 최대치까지 끌어내는 디지털 기술의 위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기술과 이야기적인 면에서 <베오울프>는 모두 나름의 진보를 이뤘다. 언제나 볼거리와 교훈, 양가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조화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수준을 높여왔던 로버트 저메키스는 다시 한 번 획기적인 이미지와 역발상을 통한 전복적인 영웅의 모습을 통해 판타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올 겨울 시즌을 여는 첫 번째 대작 판타지영화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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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1호
(2007.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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