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나>(Syriana)


<굿나잇 앤 굿럭>에서 감독을 맡아 진정한 언론’s Way에 대해 조용히 훈화말씀을 남기셨던 조지 클루니가 요즘 자국 돌아가는 꼬라지에 영 심기가 불편한가보다. 이번엔 <시리아나>라는 영화를 통해 조폭 저리가라 뺨치는 미국의 석유 이권 시스템을 고자질하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고 당 영화에서 또 감독을 맡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이번엔 제작과 배우의 자리로 이동했다. 대신 연출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에서 미국 내 마약의 총체적 난맥상을 한 큐에 멋드러지게 풀어냈던 시나리오 작가 스티븐 개건이 맡았다.

그래서일까, <시리아나> 역시 <트래픽>에서처럼 쥔공이 떼거지로 등장 이들의 스토리가 따로국밥마냥 제각각 놀다가 결국 주제는 하나로 크로스 합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두 개의 스토리와 한두 명의 주인공 가지고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침투하고 있는 미국의 석유 시스템을 온전히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CIA 요원 밥(조지 클루니 분), 변호사 베넷(제프리 라이트 분), 중동의 왕위 계승자 나시르(알렉산더 시디그 분)와 스위스 에너지 회사 직원 브라이언(맷 데이먼 분), 그리고 자살 테러리스트 와심 아흐메드(마자 무니르 분)가 각 파트별 마빡을 맡아,

석유 구매로 중동에 지불한 돈을 불법 무기로 되팔아 다시금 회수하는 과정(밥), 석유 이권을 둘러싼 미국 기업의 국제적 음모(베넷), 미국의 음모의 맞서 중동을 개혁하려 하나 되레 미국에 의해 뒤통수 맞는 모습(나시르와 브라이언), 미국 기업의 합병으로 실직자가 된 뒤 해당 기업의 유조선을 향해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순간(아흐메드)을 교차로 보여줌으로써 추접스런 미국의 석유 정치학을 스크린을 통해 생선가시 발리 듯 만천하에 드러낸다.

특기할 만한 건, 그런 전개 속에서 석유와는 코딱지만큼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쥔공들의 가족이 항시 낑궈들어 이들을 힘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석유 패권주의라는 것이 미국이라는 윗대가리들 그 바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과 짝짝꿍 붙어먹은 중동 산유국 패밀리는 물론이요, 그 밑에서 먹고 싸느라 조빠지게 힘든 이들 나라의 구성원 하나하나에까지 똥꼬 깊쑤키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테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 폭풍이 몰아친다 했나? 당 영화는 미국이 석유를 꿀꺽하면 전 세계가 꼴까닥거린다고 석유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시리아나’가 뜻하는 건 미국이 맘만 먹으면 중동의 국경을 좌지보지할 수 있다는 은어라나 모라나. 이 씹쑝들.

그렇기 땜시롱 감독은 당 영화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입하기보다는 미국이 석유를 꿀꺽하는 일련의 불법적인 흐름을 그저 담담히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향한 고자질이 되니까. 그리고 반미(反美)를 외치는 목소리가 되니까.

여튼 미국 이 쉐이들 어디다 엿바꿔 처먹었는지 야구도 그렇고, 페어플레이 정신이라는 걸 도대체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마냥 역겨워하고 미워할 수만도 없는 것이 조지 클루니나 스티븐 개건처럼 <시리아나>와 같은 영화를 통해 탈골한 정의를 제자리에 갖다 붙이려는 이들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란 단순히 판타지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잠시마나 시름을 잊게 해주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당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시절이 하수상한 때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그런 전차로 <시리아나>를 얄짤없이 베스트에 봉한다.


(2006. 3. 31. <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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