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날아라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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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감독의 <버드맨>은 슈퍼히어로물이 아니다. 극 중 ‘버드맨’은 1990년대 당시 엄청난 수익을 올렸던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였지만, 이제는 <아이언맨> 등에 밀려 잊힌 작품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은 버드맨을 연기했던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다. 이름 앞에 괄호를 쳐 ‘왕년의 스타’를 넣어도 부정할 수 없는 리건은 달갑지 않은 수식을 지우기 위해 재기를 모색한다. 슈퍼히어로 이름을 차용하지만, 궁극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은 아닌 <버드맨>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출발한다.

리건 톰슨 혹은 마이클 키튼

리건은 영화에서 잃은 명예를 찾기 위해 연극 무대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는다. 초연을 앞두고 리허설이 한창이지만, 리건은 성에 차지 않는다. 함께 무대에 오를 배우가 맘에 들지 않던 중 사고가 발생하면서 새로운 배우로 교체했지만, 안하무인격의 행동으로 속을 긁는다. 개인비서 역할을 하는 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치기를 반복하고 유명 비평가는 리건이 연극을 우습게 본다며 작품을 관람하지도 않은 채 혹평을 예고한다. 무엇보다 리건을 괴롭히는 건 여전히 마음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버드맨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극의 성공을 자신하는 것과 달리 리건의 마음속 버드맨은 실패할 거라며 계속해서 어깃장을 놓는다.

<버드맨>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예술가의 투쟁기다. 이 영화의 출발 자체가 그렇다. <아모레스 페로스>(2000)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21그램>(2003) <바벨>(2006) 등으로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던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는 여전히 예술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 안에서 불만 가득한 녀석 하나가 좋았던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며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니야, 나는 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자괴감에 시달리던 이나리투는 내면의 목소리를 아이디어 삼아 영화를 만드는 것이 상처 입은 예술혼의 치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다. 씨는 이미 뿌려져 있었다.”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배우를, 그중에서 한물간 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게 흥미로울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할리우드에 슈퍼히어로물이 넘쳐나니 한때 슈퍼히어로 영화에 출연해 명성을 얻었던 인물로 설정하면 배우에 대한 사연인 동시에 글로벌 기업형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잘 나타내는 풍자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연기할 배우는? 마이클 키튼 밖에 없었다. 리메이크된 <로보캅>(2014)에서 옴니코프 사의 CEO 역할로 출연했던 마이클 키튼은 사실 팀 버튼 연출의 <배트맨>(1989)과 <배트맨2>(1992) 이후 인상에 남을 연기를 선보이지 못했다. “이제까지 맡은 캐릭터 중에 가장 공감이 덜 간다. 극 중 리건과 나는 배우가 직업이고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만 가지고 있다.” 안다, 마이클 키튼 본인 입으로 인기가 떨어졌다는 걸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이클 키튼이 리건 역을 맡으면서 허구의 영화에 접붙임 된 사실의 아우라다.

버드맨 혹은 배트맨

극 중 버드맨의 존재는 이나리투 감독이 영화를 위해 급조(?)한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아니다. 버드맨의 기원은 배트맨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DC 코믹스는 1938년에 출간된 슈퍼맨이 큰 인기를 얻자 새로운 슈퍼히어로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밥 케인은 즐겨 읽던 <플래시 고든>의 호크맨과 슈퍼맨을 섞어 파란색과 붉은색 타이즈에 거대한 날개를 가진 버드맨을 스케치했다. 성에 차지 않았던 밥 케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비행기 스케치와 박쥐의 날개를 본떠 그림을 다시 그렸고 그 과정에서 버드맨은 현재 우리가 배트맨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최종 귀결됐다.

버드맨과 배트맨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 그리고 이 둘을 모두 연기한 마이클 키튼의 배우로서의 경력까지, ‘배트맨’으로 맺어지는 이 특정한 계보는 <버드맨>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다. 브루스 웨인이라는 상처 입은 영혼과 배트맨이라는 어둠의 기사의 관계가 시사하는 바처럼 버드맨이라는 초자아로 형상화되는 리건의 내적 갈등은 극 중 모든 사건과 사고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연극의 성공을 위한 리건의 일련의 몸부림은 결국 버드맨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내러티브의 텍스트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필요하다. 리건에게 극복은 버드맨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우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그대로 이나리투 감독의 예술적 야심과 직결한다. 이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신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이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2시간에 달하는 상영 시간이 편집이라는 바느질 없이 원테이크 원숏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이나리투는 “시간과 공간의 분리가 영화의 본질이라 생각하고 늘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이번에는 분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힘든 작업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이나리투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버드맨>을 끌고 간다. 시간의 측면에서 부와 명성을 누렸던 과거와 재기를 모색하는 현재를 각각 버드맨과 리건으로 분리하지만, 화면에 함께 포착해 현실과 환상을 결합한다. 공간의 측면에서 브로드웨이를 배경 삼아 무대와 무대의 이면을 넘나들고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공연을 카메라로 담아 영화적으로 구성하며 예술 매체 간의 경계를 무화(無化)한다.

과거와 현재, 앞과 뒤, 연극과 영화, 마이클 키튼으로 대변되는 영화적 이미지와 현실의 사연 등, 이나리투 감독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그래비티> <트리 오브 라이프> 등)의 카메라를 통해 동전의 양면 같은 개념들을 롱테이크를 빌려 하나로 엮는다. 심지어 <버드맨>의 롱테이크는 단 한 번의 컷도 없어 보이지만, 밤에서 새벽으로 바뀌는 밤하늘, 하늘을 나는 리건 톰슨 등의 장면은 실은 CG로 감쪽같이 처리해 편집 자국이 없도록 눈속임했다. 이나리투 감독은 시공의 결합을 넘어 아예 ‘초월’로 나아간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버드맨>이 테마로 삼은 초월은 이나리투 감독이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로스>(2000)부터 꾸준히 견지해 온 작가적 관심사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2004)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뿌리내린 세 개의 삶이, <바벨>(2006)은 4개국에 흩어진 네 커플이 교통사고를 계기로 하나로 엮이면서 펼쳐지는 운명적인 관계에 대한 영화였다. 이들 영화는 하나같이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 소통으로 수렴되는 메시지로 호평을 받았다. 이들 영화는 <버드맨>과 다르게 시간과 공간이 철저히 분리된 상태에서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핵심 주제는 공유하고 있다.

이나리투가 고수하는 시공 초월의 다중 이야기 전개 방식은 그보다 앞서 이제는 고인이 된 로버트 알트만이 도입하며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로버트 알트만은 <숏컷>(1993)에서 전례 없던 22명의 주요 인물(전체 출연진이 아니다!)을 등장시켜 그들 각자를 균형 있게 바라보며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는 현대의 인간관계를 정의했다. 이의 방식은 이나리투를 비롯해 폴 토마스 앤더슨 등 후배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로버트 알트만도 영향받은 이가 있었다. 아니 영감을 준 작가라고 해야 옳겠다. 헤밍웨이 이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레이먼드 카버다. 국내에는 김연수 작가가 번역에 참여한 <대성당>으로도 유명한데 로버트 알트만은 이 단편집에 포함된 ‘작품들’을 하나로 엮어 <숏컷>을 완성했다. 카버의 여러 단편 속 사는 방식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제각각인 삶이 결국에는 연결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숏컷>으로 구체화하며 이후 발표한 모든 영화에서 이와 같은 서술 방식을 고수했다.

알트먼의 유산을 이어받은 이나리투 감독의 <버드맨>에도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 등장한다. 로버트 알트먼을 매개로 한 카버와 이나리투 사이의 또 하나의 계보. 바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이다. 이나리투는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어 하는 리건은 이러한 연극의 요소를 자신의 생활에 투영하고 점차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동화된다”며 “<버드맨>과 놀라울 정도로 주체가 일치했기 때문에 카버의 단편 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배경을 밝힌다.

인생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것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미 결혼 경험이 있는 두 커플이 등장해 사랑에 대한 설전을 벌인다. 발단은 심장전문의 멜과 테리 커플의 과거사다. 테리에게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옛 남자가 있었다. 사랑한다며 테리를 때리고 거칠게 대했던 그는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로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 보였다.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테리는 이 또한 사랑이었다, 말하고 멜은 그런 걸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며 그녀의 과거를 부정한다. 그 자리에 둘러앉아 있던 네 명은 테리의 옛 남자의 사례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나누며 결론을 내리니, 멜의 표현을 빌려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 게 뭘까?”

그것이 어디 사랑뿐일까.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의문투성이가 아닌가 말이다. 인생에서 부와 명예를 얻는다는 건 운을 배제하면 기술적인 영역에 가깝다. 리건이 극 중 ‘버드맨’ 삼부작으로 인기를 얻고 그에 따른 고액의 출연료를 챙길 수 있었던 건 영화를 고르는 그의 안목과 연기력, 블록버스터를 감당할 수 있는 제작사의 존재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수단이 작용한 탓이 크다. 그가 지금은 잊힌 스타가 된 것 역시 ‘버드맨’ 4편을 거부하면서 이후 부진을 거듭한,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판단 미스가 작용한 결과다.

지금의 리건이 카버 원작의 연극에 올인하는 건 그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안겨준 ‘버드맨’이 원인이다. 하지만 리건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고군분투하는 건 전적으로 버드맨에게만 그 책임을 묻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예컨대, 딸 샘(엠마 스톤)과의 부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데에는 리건의 무관심이 결정적이었지만, 관심을 둬주지 않는 아빠를 향한 반발심으로 행한 그녀의 마약 전과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리건 주변에서 발생한 모든 관계와 불화의 대립은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 결과이지 ‘버드맨’이 모든 원인은 아니라는 거다.

멜의 커플이 사랑이다, 아니다 부딪히는 것처럼 리건에게 인생은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어디 그런가. 알고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무엇이다. 연극의 실패를 예감한 리건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오프닝 무대에서 테리의 옛 남자로 분해, 아니 그의 입장에 완전히 동화되어 소도구 대신 실제 총을 몰래 가져와 자살을 시도한다. 리건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인데 오히려 관객들은 사실적인 연기에 기립박수로 화답하고 혹평을 예고했던 평론가는 마음을 바꿔 다음날 신문에 호평을 올린다.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초보다. 죽기 전까지 인생의 신비에 대해서 논할 수는 있을지언정 정의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야 가능할까. 테리의 옛 남자는 그래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안 그래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리건은 세상이 전과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전까지 리건에게 인생이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전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 문을 열어 더 넓은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삶과 죽음마저 초월한 리건은 버드맨이 되어 하늘로 비상한다.

딴지일보
(20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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