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왕> 백승화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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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화 감독이 연출한 <걷기왕>은 <족구왕>(2013)의 속편이 아니다. 세계관은 비슷한 면이 있다. 우리가 흔히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재능을 보이는 청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걷기왕>의 주인공은 만복(심은경).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한 까닭에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가 없어 걷는 데에는 도가 튼 학생이다. 꿈과 열정으로 학생을 지도하는 담임 선생(김새벽)은 만복의 걷기 재능을 살려 경보를 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평상시 걷는 것과 경쟁으로 걷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만복이 쉬이 경보에 적응하지 못하며 낙오하는 일이 잦아진다. 이는 꿈과 열정이 부족한 만복의 문제인 걸까? 만복 본인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백승화 감독은 <걷기왕>을 만들었다.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자기자랑 격의 충고에 대한 백승화 감독 나름의 응답이다. 이 영화가 품은 메시지처럼 백승화 감독은 의무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전공(2006년 계원조형예술대학 졸업)했고 다큐멘터리로 장편 데뷔한 그에게 <걷기왕>은 처음 만드는 극영화다.

느릿하게 걷는 모양새를 닮은 백승화 감독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의 말투와 다르게 영화의 촬영 현장은 꽤 복잡하게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신고식이었던 셈인데 자기만의 ‘걸음걸이’로 무사히 통과한 듯한 인상이었다.

극영화는 단편(<지각생들>(2012) <화목한 수레>(2014))을 제외하면 처음이시죠. 어떻게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인가요?
2013년쯤이었어요. 특별한 계기는 아니었는데 장편 하나를 쓰고 싶었어요. 저예산으로 생각하고 시놉시스를 썼죠. 그후 지금의 제작사(인디 스토리)와 얘기를 했어요. 못 미더워하는 눈치더라고요. (웃음) 처음부터 ‘걷기왕’이라는 제목은 아니었어요. 쓸모없는 것을 잘하는 주인공이 경쟁 세계로 들어와서 펼치는 이야기였어요.

원래는 볼링을 소재로 준비했어요. 그러다 든 생각이 볼링보다 더 쓸데없는 것이면 좋겠더라고요. 다시 생각한 게 오목이었는데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보다 더 쓸모없는 것이 뭐가 있을까. 숨쉬기나 걷기가 있구나. 특히 걷기는 경보가 있으니까 영화로 만들기 괜찮겠더라고요. 제목까지 <걷기왕>으로 정해서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기존의 ‘~왕’ 시리즈로 <족구왕>이 있었죠. 그 때문에 <걷기왕> 제목이 부담스럽지는 않던가요?
원래 ‘왕’ 자가 들어가면 임팩트가 있는데 ‘걷기를 정말 잘한다’라고 해서 <걷기왕>이라고 지었어요. 쓸모없는 재능을 생각하다가 숨쉬기도 생각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숨쉬기왕’은 조금 이상하고 ‘걷기왕’이 좋더라고요. 발랄하고 영화의 톤과도 잘 맞고.

<걷기왕>은 경쟁에 매몰되기보다는 뒤처지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그런 주제 의식은 록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를 다룬 감독님의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10)에서 엿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나리오 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단편을 찍을 때는 이런 게 재밌을 것 같아서 했어요. <걷기왕>은 좋아하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반드시 크게 들을 것> 만들 때도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좋아하는 걸 많이 넣어서 완성했으면 좋겠다. 그런 면에서 <걷기왕>과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은 비슷해요.

이를테면 인물이 그래요. <걷기왕>의 만복이도 그렇지만, <반드시 크게 들을 것>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조금 모자란 느낌이 있죠. 그런 부족함을 기반으로 어떤 계기를 통해 노력하고 각성해서 뭔가를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작은 성장을 이뤄내는 이야기로 나아가죠. 그런 면이 닿아 있어요.

세계관은 닿아 있지만, 극 영화인 <걷기왕>과 다큐멘터리인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은 아무래도 촬영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죠.
다큐멘터리를 작업한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 리얼함을 담아내기 위해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극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미기도 하고 장치를 사용하기도 해요. <걷기왕>의 경우에는 내레이션을 활용하는 등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넣고 싶었어요. 장르의 특성상 다큐멘터리는 여유를 가지고 촬영과 편집을 할 수 있지만, 극영화는 철저한 계산 하에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정리가 돼서 나왔을 때 만족감이 더 크더라고요. 물론 급하게 촬영하고 그런 것들은 힘들었어요.

다큐멘터리도 그렇고 감독님께서는 애니메이션 작업(단편 <잘 자, 좋은 꿈꿔!>(2006))도 하셨는데요. 두 장르는 극영화보다 개인적인 성격이 더 짙어요. 극영화는 집단 작업이다 보니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
개인적으로 혼자 하는 걸 좋아해요.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제일 힘든 건 커뮤니케이션이었죠. 다큐멘터리 작업은 소규모이기 때문에 거리를 둘 수 있어요. 그와 달리 <걷기왕>과 같은 극영화는 배우와 스태프 등 수많은 사람과 소통을 하고 제가 원하는 바를 이해시키고 의견을 듣고 하는 등 주변을 아우르는 부분에서 고민이 있었죠.

그 때문에 극 중 만복이처럼 멀미를 하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웃음) 농담이고요. ‘선천성 멀미 증후군’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하신 건가요?
어디든 걸어서 다녀야 하는 주인공이 차를 탈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선천적 멀미 증후군을 만들었어요.

심은경 배우를 만복이 역에 캐스팅하였습니다. 심은경 배우가 캐릭터를 잘 가지고 논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심) 은경 씨와 아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상업영화에서 인정받은 배우가 이렇게 작은 영화에 왜 참여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어요. 처음 미팅 때 그 이유에 관해서 물어봤어요. 가장 큰 이유는 은경 씨가 자신의 모습과 비슷해서 하고 싶다는 판단을 했더라고요. 편하게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걷기왕> 시나리오를 보게 된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운이 좋았어요.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때라 은경 씨가 어떤 사람일까 관찰을 했죠. 은경 씨에게 만복이를 이렇게 연기해주십사 요구하기보다는 은경 씨의 모습으로 만복이를 연기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싱크를 맞춰가며 작업을 했어요. 좋더라고요. 극 중 만복의 걷는 모습은 은경 씨의 걸음걸이인데 어머님이 촬영장에 오시면 “등 좀 펴고 다녀라.” 그러셨어요. (웃음)

말씀처럼 연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감독님께서 배우의 애드리브를 많이 열어두셨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딱 잘라 말하기 모호한 부분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배우들에게 정확하게 연기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코믹함을 유발하는 장면은 정서나 호흡이 중요하거든요.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얘기해야 하죠. 다만, 은경 씨 부분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열어놨어요. 저 나름의 뭔가를 더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어떤 역할에 대해서는 제한을 했죠.

배우들에 따라서는 불편해하는 예도 있었어요. 육상부 코치를 연기한 허정도 배우는 제가 짜인 연기를 부탁드리니까 불편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후에는 애드리브도 할 수 있게끔 열어주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 훨씬 캐릭터가 살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통해 극영화를 처음 연출하면서 공부를 하게 됐어요. 배우가 느낌 감정에 맞게 가는 게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맞더라고요. 그런 감정들을 영화의 콘셉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지켜주려고 했어요.

그런데도 연출자로서 지켜나가야 할 영화의 ‘톤 앤드 매너’가 있으셨죠?
전체적으로 영화가 동화 같았으면 했어요. 소의 내레이션(안재홍 목소리 출연)을 등장시킨 것도 ‘옛날에 만복이가 살았는데’ 이런 식으로 누군가 읽어주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였어요. 그에 맞춰 연기도 연기지만, 그래픽과 미술과 촬영에서 과장되거나 과감히 생략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보통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거기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어요. 후반 작업할 때도 리얼리티에 크게 얽매이거나 하지 않았어요.

우선적으로 심은경 배우가 관객들에게 인지도가 가장 높은 배우이지만, 독립영화를 꾸준히 보아온 이들이라면 수지 역의 박주희(<거인>(2014) <마녀>(2013) 등)와 만복이 담임 선생님 역할의 김새벽(<한여름의 판타지아>(2015) <줄탁동시>(2011) 등) 배우가 굉장히 반가울 듯해요.
수지 역할에 누구를 캐스팅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박) 주희 씨 같은 경우, 무섭고 냉소적인 역할로 많이 나왔었죠. 제가 처음 봤을 때는 윤성호 감독의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2)에서였어요. 제가 메이킹을 찍었는데요. 그 작품에서 주희 씨는 노란머리를 한 고등학생 역할로 꽤 코믹했어요. ‘츤데레’ 같은 성격이랄까, 코믹한 연기도 능청스럽게 잘 하기 때문에 수지 역할에 적역이었어요.

김새벽 배우의 코믹한 연기도 처음 보는 거라 신선했어요.
(김) 새벽 씨는 극 중 역할과 갭이 커서 본인이 엄청 부담스러워 했어요. “왜 저를 캐스팅하셨어요?” 하고 나서는 되게 좋아했거든요. 영화 촬영 후에 “더 B급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그러셨어요. (웃음) 새벽 씨는 만나 보니까 재밌는 분이었고 본인도 다행히 맡은 역할을 재밌어 했어요. 은경 씨를 비롯해 주희 씨, 새벽 씨 등 저는 개인적으로 <걷기왕>의 캐스팅이 굉장히 만족스러운데요. 독립영화를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메이저와 인디를 아우르는, 물론 효길 역을 맡은 보이그룹 FT아일랜드의 이재진 배우도 출연하지만, 독립영화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감독님께서는 <걷기왕> 연출의 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셨죠. “특별한 꿈이 없거나 하고 싶은 게 없는 것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꿈은 중요하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이를 이뤄가는 것도 중요하고요.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저도 어렸을 때 그랬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한 것 같아요. 너 앞으로 뭐할 거니?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열심히 해야 하지 않니? 그런 말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를 무능하게 느끼게 하고 자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생각인데요. 기성세대가 흔하게 ‘노력하면 된다’고 하는 말은 무책임하게 들려요. 그런 생각이 <걷기왕>을 시작하는데 작용하지 않았나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막살라는 의미는 아니죠.
뭔가를 하더라도 천천히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꿈을 이루기 위해 고민도 하고 지금 해결이 안 되면 더 생각하고 말이죠. (스포일러 주의!!) 만복이도 경보 시합을 하던 중 마지막에는 걷는 걸 그만두잖아요. 그렇다고 만복이가 인생의 패배자로 끝나는 건 아니죠. 경보가 아니더라도 친구와 도보여행도 하고 그러면서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는 건데요. 그래서 제가 만복이 이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된다는 걸 결정해주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경보로 돌아가 엄청 대단한 선수가 될 수도 있고, 그대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백수가 될 수도 있는 건데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자신이 만족한다면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또한 감독님의 연출자로서의 태도와도 연결될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구별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하실 계획인가요?
딱히 생각은 안 해봤어요. <걷기왕> 만들면서 앞으로 영화 못 해먹겠다, 이런 얘기도 했는데요. (웃음) 영화 완성하고 나니까 엄청 뿌듯하더라고요.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반드시 크게 들을 것> 3편을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10년 지나서 기회가 되면 찍고 싶은 생각이고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해요. 일단 지금은 <걷기왕>에 대한 생각만 하려고요.

사진 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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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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