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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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영은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배우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네 달 정도 지난 올해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는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 벌써 세 편이다. 지난해 송강호는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에 출연하며 다작(?)을 했는데 정재영은 이를 네 달 만에 이룬 셈이다.
 
그런 정재영을 두고 <방황하는 칼날>의 이정호 감독은 이렇게 평가했다. “보통 배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으로 연기할 것 같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정재영은 아무것도 예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재영에게는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확연히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구현하기 때문인데 스타라기보다 배우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정재영은 평범한 외모가 연기 생활에 플러스로 작용한 경우다.
 
<플랜맨>에서 강박증을 지닌 남자의 로맨틱한 사랑을 그려 보였던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딸을 잃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상현’을 연기한다. 상현은 딸이 죽기 전까지 아내 없이 소박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딸이 갑작스럽게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상현은 하나뿐인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그로서는 딸을 폭행한 가해자들을 경찰들이 검거해 법의 심판이 가해지도록 바라는 심정이지만 마음처럼 이뤄지지는 않는다. 수사는 지지부진할 뿐더러 가해자들이 딸 또래의 고등학생이다 보니 미성년자에게 관대한(?) 법에만 의지하기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차, 익명의 제보로 가해자 중 한 명의 집 주소가 전달된다. 그곳에서 범인을 발견한 상현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또 다른 공범을 찾아 나선다.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피해자에서 졸지에 가해자로 처지가 전락한 상현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복수는 정당한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처벌을 가하지 않는 법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을 제기한다. 그와 같은 상황이 극 중 상현의 특수한 경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슷한 사례가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탓이다.
 
하지만 영화는 해답을 주는 대신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을 좀 더 깊게 바라보는 쪽을 택한다. “뉴스를 통해 비극을 많이 접하지만 우리는 안타까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어디선가 고통을 스스로 견뎌내고 있을 누군가를 대신해 외쳐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정호 감독이 <방황하는 칼날>을 통해 의도하는 바다. 그렇기에 이정호 감독에게 상현의 캐스팅은 관객의 눈높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배우가 절실했다.  
 
정재영은 배우이기 이전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이면서 또한 자식을 둔 부모이기도 하다. 정재영은 이정호 감독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하게 다른 영화의 캐릭터처럼 설정을 갖고 시작하지 말자는 것이 정재영의 의견이었다. “상현은 나일 수도 있고 감독일 수도 있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대변하는 캐릭터였기에 정재영은 극 중 상현이 죽을 딸을 시체 안치소에서 확인하는 순간이 정신적으로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딸의 죽음을 인정하기가 싫어서였다. 정재영 또한 아비된 입장에서 아무리 연기라고 한들 그와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터다. 이것을 진심이라고 해도 좋을까. 상현을 연기한 정재영은 늘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확실히 그의 필모그래프를 보면 사람 냄새 물씬한 캐릭터가 반(半)수를 차지한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5)에서는 결혼 상대를 구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는 농촌 총각의 비애를, <김씨 표류기>(2009)에서는 쏟아지는 빚 독촉에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감행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표류하는 보통 사람의 아픔을, <우리 선희>(2013)에서는 나이든 선배 감독으로 후배 여자 졸업생을 만나 진하게 연예를 나누는 우리 주변의 흔한 사랑의 풍경을 대리해 보였다.    
 
이처럼 보통 사람의 연기에 능수능란한 정재영의 최대 강점은 감독이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따라 천변만화한 캐릭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정재영의 필모그래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장르를 초월하고, 선인과 악인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력에 있다. SF인 <열한시>(2013)와 로맨틱 코미디인 <아는 여자>(2004)가, <내가 살인범이다>(2012)의 형사와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의 악덕 회장이, 심지어 <신기전>(2008)과 같은 블록버스터와 <우리 선희>와 같은 예술영화가 공존하는 식이다.
 
이는 그가 다작의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 정재영은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1998)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로 이름을 알리면서 매년 쉬지 않고 두세 편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 왔다. 직업인으로서의 성실성과 배우로서의 보통 사람의 이미지는 정재영이 롱런할 수 있는 토양이면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이끄는 그만의 무기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과 성실성, 이는 또한 아버지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비록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루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상기토록 한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극 중 상현의 행동에 지지를 표한다면 정재영의 연기에서 아버지의 초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방황하는 칼날>은 배우로서 정재영이 가진 모든 ‘칼날’을 펼쳐 보이는 영화인 것이다.    

시사저널
NO. 1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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