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 노골적인 감독의 분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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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일 감독의 <반두비>는 오랜만에 만나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영화다. 특히 그동안 치부됐던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폐부를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획의 과감함이 돋보인다. <반두비>를 향한 평단의 찬사는 그런 감독의 진심어린 태도가 드러난 까닭에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동일 감독이 누차 강조한 바, 청소년을 위해 만들었다는 의도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민서(백진희)로 상징되는 청소년들에게 감독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반두비’는 방글라데시어로 ‘친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고액의 학원비로 고민에 빠진 여고생 민서와 직장 체불금으로 곤란을 겪는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은 친구가 되기엔 먼 사이처럼 보인다. 민서가 버스에서 카림의 지갑을 줍지 않았더라면, 그런 민서를 카림이 끝까지 쫓아가 잡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남남이었을 것이다. 경찰서로 넘기려는 카림에게 민서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구를 넘어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카림을 향한 한국인의 불편한 시선은 결국 이 둘을 추억을 간직한 친구사이로 갈라놓고야만다. 

줄거리에서 감지되듯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의 시선은 폐쇄적이다. 110만의 이주민이 존재하는 다인종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주노동자를 축으로 극이 진행되는 영화는 <반두비>가 처음이다. 이처럼 <반두비>는 과거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가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또한 <처음 만난 사람들> <로니를 찾아서> <시선1318>의 ‘달리는 차은’까지, 이주노동자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가 <반두비> 개봉을 전후해 집중됐다는 점에서 징후적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의 배경에 불과했던 이주노동자는 이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했다. 삶의 고민을 나누는 친구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가족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반두비>가 보여주는 민서와 카림의 로맨스는 할리우드 내의 백인과 흑인의 사랑처럼 커뮤니티 안에서 암묵적으로 꺼려지던 인종관계를 한국영화사(史) 최초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에 가깝다.

안 그래도,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 <방문자>(2006)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6)에 이은 ‘관계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성장배경이 상이한 이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띤다. 다만 연출의 방식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방문자>가 여호와의 증인 청년과 386지식인의 우정을 풍자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계급이 서로 다른 친구 사이의 우정의 이면에 잠재한 죄의식을 그리스 비극으로 형식을 가져갔다면 <반두비>는 로맨틱코미디의 틀을 빌려와 민서와 카림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맨틱코미디의 차용은 민서와 카림의 관계가 주는 혁명성의 충격을 얼마간 완화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청소년 영화라는 감독의 말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장르의 재미를 우선하면서 주제를 부각하는 방법은 자칫 설교조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의 안전핀 역할을 한다. 소수자이면서 약자이고 이방인인 민서와 카림을 통해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면을 발가벗김으로써 상식을 설파하는 작품이라고 볼 때 형식은 <반두비>의 전략적인 화술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형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민서와 카림의 목소리보다 감독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까닭이다. 작심이라도 한 듯 MB를 향해 쏟아 붓는 날선 농담들은 그 의도가 눈에 뻔히 보여 민서와 카림을 뒤로 밀어내는 경우가 잦다. 장르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와 여유에 앞서 MB정권을 향한 감독의 분노와 야유가 먼저 느껴진다. 인물의 사연을 보여주기보다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꼭두각시로 민서와 카림을 내세운 형국인 것이다. 그래서 “명박이 믿고 뉴타운에 투자했다가 망했어” “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은 쥐인가요?”와 같은 장면을 대할 때마다 과연 영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는 신동일 감독을 위시해 MB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는, 아니 한국사회의 탈골된 상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영화라면 현실의 모순을 좀 더 세련되게 접근하는 예술적 절제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피할 길이 없다. 더욱이 신동일 감독의 의도처럼 지금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청소년들에게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했다면 말이다. 오히려 그런 강박관념이 민서의 캐릭터를 대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차별받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된 카림과 달리 민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도 벌고, 카림이 겪는 부조리에 대신 저항할 줄도 아는 모습에서 신동일 감독 본인의 분노를 치유하기 위한 희망의 발로로 이상화된 청소년의 모습이 겹지는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현실참여도 일종의 놀이다. 극중 민서와 같은 이들은 놀이로써 현실에 저항한다. 전경이 쏘아대는 물대포에 머리감기로 응수하고 곤봉을 폭력 삼는 진압에 춤과 노래를 방패삼을 줄 아는 세대다. 오히려 감독의 자의식을 살짝 덜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야기 속에 담긴 직접적인 분노를 형식의 유머와 여유로써 우회했다면 청소년에게 더욱 밀착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오해 마시길! 이 얘기가 영등위의 청소년관람불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왜 청소년관람불가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선한 의지만 가지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는 정교한 과정이 동반됐을 때 선한 결과를 담보한다고 믿는다. <반두비>가 반가우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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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6)

3 thoughts on “<반두비> 노골적인 감독의 분노가 아쉽다”

  1. 저는 특히 신만수 사장집 시퀀스에서 그런 걸 느꼈어요. 다소 도를 넘는 영악함이 존재하여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래도 영화가 재미있었던 건 부인하기 힘듭니다만 ^^

    1. 그 장면에서 사장 딸의 대화가 굉장히 무서웠어요. “왜 우리 착한 아빠한테 모라 그래!”였던가 ^^; 저도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인지 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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