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과 앨프리드 베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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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은 소문난 ‘Sci-Fi'(이하 ‘SF’) 광이다.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에서 100권의 책을 추천하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필립 K. 딕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 주옥같은 SF작품을 다수 포함시켰고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면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미 리들리 스콧이 1982년 <블레이드 러너>로 영화화한 적이 있다.)를 찍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박찬욱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SF소설가를 꼽으라면 바로 앨프리드 베스터다. <파괴된 사나이>(1953) <타이거! 타이거!>(1956) 등을 통해 명성을 얻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은 SF팬뿐만 아니라 고른 독자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SF소설치고 슈퍼히어로와 하드보일드 등 미국 대중문화의 근간이 되는 요소가 두드러져 특히 그렇다. <파괴된 사나이>는 그런 베스터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태양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재벌총수 벤 라이히가 라이벌 기업총수를 제거하려던 중 이를 눈치 챈 형사 링컨 파웰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다룬 내용. DC코믹스에서 작가로 활동했던 앨프리드 베스터는 자신의 이력을 살려 <파괴된 사나이>를 벤 라이히와 링컨 파웰의 초능력 대결로 몰아가지만 오히려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면도날 씹듯 거칠고 냉소적인 이들 주인공의 대사는 필립 말로우의 그것처럼 간결하면서도 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챈들러 특유의 건조한 도시 묘사에 색깔을 칠한 듯한 앨프리드 베스터의 현란한 시각적 묘사는 ‘불꽃놀이’ 문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은 당시 할리우드에서도 영화화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파괴된 사나이>는 스크린을 통해 재현된 적이 없다. 이유가 아이러니하다. 불꽃놀이 문체에도 불구, 절대 활동사진으로 시각화할 수 없는 극중 설정 탓이다. <파괴된 사나이>에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 에스퍼(Esper)가 등장한다. 얼핏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돌연변이 예지자와 동류(同類)로 보인다. 다만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음악’으로 심리를 조작한다는 설정은 앨프리드 베스터만의 아이디어로, 제 아무리 날고기는 감독이라도 이미지로는 어떻게 표현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파괴된 사나이>를 영화화한 적은 없지만 대신 제목을 차용하기도 했다. 훗날 <복수는 나의 것>으로 개봉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의 제목은 다름 아닌 <파괴된 사나이> 극중 딸을 잃은 동진(송강호)이 유괴범의 복수에 인생을 올인하며 내적으로 무너져가는 심리가 <파괴된 사나이>라는 제목과 너무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하나의 사례만 가지고 박찬욱 감독의 앨프리드 베스터에 대한 애정의 정도를 모두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앨프리드 베스터의 두 번째 장편 <타이거! 타이거!>는 그를 향한 박찬욱 감독의 애정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타이거! 타이거!>는 실제로 박찬욱 감독이 직접 영화화를 바란 작품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나 프랑스에서 연출 제의를 받을 때면 SF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단다. (딴지일보 130호 ‘<올드보이> 박찬욱을 만나다’) 이왕에 자본력이 센 외국에서 연출할 바에는 한국에서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여 프랑스 제작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을 밝혔으니, 그게 바로 <타이거! 타이거!>다. 다만 그 후로 프랑스에서 답변이 없어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타이거! 타이거!>는 수십 년 전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더라고요. 근데 비운의 프로젝트로 유명해요. 각본은 제대로 안 나오고 영화는 계속 엎어지고.”

<타이거! 타이거!>의 영화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파괴된 사나이>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미래 사회의 배경은 할리우드가 탐낼 만한 볼거리였지만 (이는 <점퍼>에서 구현됐다!) 걸림돌은 주인공 걸리버 포일이 겪는 공감각증상. 폭발 사고 여파로 감각을 인지하는 두뇌세포가 혼란을 일으켜 소리를 시각으로, 움직임을 소리로 지각한다는 설정이 소설에서는 가능했을지언정 영화화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비명이 이상한 패턴의 빛처럼 포일에게 시각적으로 찾아왔다.’ ‘목재의 감촉은 시큼하면서 분필 같은 맛이었고, 손가락에 만져지는 돌은 새콤달콤했다.’는 지문을 그 누가 이미지화할 수 있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올드보이>는 <타이거! 타이거!>와 여러 면에서 흡사한 설정이 많다. 170일 동안 우주 미아가 되어 우주선에 갇혀 있는 포일의 사연은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감금돼 군만두로 연명하는 오대수(최민식)를 연상시킨다. 포일을 발견한 우주선이 그를 구출하지 않은 까닭에 포일의 평생의 복수 대상이 된다는 설정은 또한 오대수가 복수를 삶의 의지로 삼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시각적 묘사에 탁월한 베스터의 문체가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계와 일맥상통하다는 점에서 혹시 박찬욱 감독이 <타이거! 타이거!>에 대한 영화화의 아쉬움을 <올드보이>를 통해 드러냈던 건 아닌지 의심 아닌 의심(?)이 드는 것이다.

최근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과 관련한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제작사 겸 배급사 카날플러스와 함께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리메이크를 추진 중이라는 얘기였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박찬욱 감독의 해외 진출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게 사실이다. 하여 심심찮게 SF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박찬욱 감독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비쳐진다. SF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써도 박찬욱 감독이 해외진출작으로 한국에서 쉽지 않은 SF영화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굳이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박찬욱 감독이 만든 SF영화를 볼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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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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