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들>의 원제는 ‘See you Next Tuesday’다. 앞 글자만 따로 떼서 발음하면 ‘CUNT’, 즉 여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욕이 된다. 그처럼 <미친년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모녀는 호감형(形)과 거리가 멀다. 막내딸 모나는 임신을 한 상태이지만 자기 몸 돌보기를 돌(?)같이 하고 그런 딸을 잘 돌봐야할 엄마는 알코올 중독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며 레즈비언인 첫째 딸 조단은 이들과 거리를 둔 채 따로 살고 있다.
가족 간의 불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들 모녀가 (안 좋은 의미에서) 좀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컨대, 모니카는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지만 배알이 꼴리면 고객과의 언쟁도, 동료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모니카 주변에는 그녀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 곧 태어날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이렇게 이들 모녀에게는 부재한 것투성이다. 모나의 아빠이자 엄마의 남편도 이 영화에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조단은 애인에게 빌붙어 사는 처지다. 게다가 이들은 소수자다. 가진 건 그나마 가족뿐인데도 보듬어주기는커녕 서로의 상처만 더욱 헤집어대며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을 뿐이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입에서 저절로 ‘미친년들’ 소리가 나올 정도로 제 정상이 아닌 것이다. 이들 모녀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감독 드류 토비아는 이를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과거를 따져 들어가 원인을 규명하는 것보다는 원제 ‘See you Next Tuesday’의 의미처럼 내일을, 다음 주 화요일을, 결국 미래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 속 모녀는 ‘진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호감이지만 감독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이들의 행동과 감정을 관조한다. 그것은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것도 있지만 이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게 그렇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헐뜯고 내외하면서도 결국에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하게 되는 것도 이유 불문, 설명 불가, 가족이란 관계 때문이다. 하물며 소수자인 이들에게 가족은 세상에서 유일한 울타리요, 보금자리다. 직장도 잃고, 사는 집에서도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모나가 만삭의 몸을 이끌고 도움을 청하는 이는 다름 아닌 엄마와 조단이다.
이를 계기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모녀는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미친년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바로 이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 엄마와 조단은 누구랄 것도 없이 화해의 대화를 청하고 이것이 축복의 신호탄이라도 되듯 모나에게서 새 생명의 탄생이 임박한다. 그 전까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미친년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시금 보이는 순간. 앞으로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 메시지만큼은 분명히 한다. ‘미친년들에게도 내일은 있다’
14회 전주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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