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 저널리즘 시대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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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되고는 했다. 하지만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과 <두 개의 문>이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편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들 영화에 ‘무비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이들이 생겼다. 무비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그 등장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개의 문>의 폭발적인 흥행과 함께 ‘무비 저널리즘’의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무비 저널리즘이란 영화를 통해 공공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관한 정보를 보도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용산 참사의 진실, 즉 사건은 존재하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유야무야 진실이 증발해버린 과정을 시간별로 재구성해 꼼꼼히 따져 묻는 <두 개의 문>이 무비 저널리즘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비위크> 538호 ‘<두 개의 문> 흥행 열풍’ 기사에서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사람들이 몰랐던 진실을 꼼꼼한 기록영상으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과정에서 사회적 담론을 형성했고, 나아가 같이 분노하고 항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점에서 무비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비 저널리즘의 등장 배경

<두 개의 문>과 같은 무비 저널리즘적 속성을 지닌 영화의 출현은 기존 저널리즘의 역할 부재를 반증하는 현상과도 맞닿아있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장일호 기자는 “기존의 언론들이 직무유기를 했다. 진보매체는 중요한 취재원인 용산 유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온정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보수매체는 정부의 용산 진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허위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용산 참사의 본질은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언론이 중대한 사안에 대해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단편적이고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성격에 더 가까이 있음을 증명한다.

<두 개의 문>이 용산 참사를 전후한 과정을 재구성하는 방식 중 하나는 ‘아프리카TV’와 같은 인터넷방송에서 촬영한 영상을 활용하는 쪽이다. 다시 말해, 기존 주류 언론의 속성상 오랫동안 현장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의치 않은 작업에 속한다. 한정된 인력으로 3년 넘게 진행된 용산 참사의 재판 과정을 매번 따라다니면서 기사회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PD수첩>(MBC) <추적60분>(KBS) <돌발영상>(YTN) 등과 같은 PD 저널리즘이지만 이명박 정권 들어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축소되는 상황에서 전과 같이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두 개의 문> 외에도 2007년 벌어진 석궁사건의 재판을 따라가는 <부러진 화살>(2011)이나 장애인 성폭행과 관련한 사학재단의 비리를 폭로한 <도가니>(2011)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국민적 관심을 모은 데에는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가 밑바탕에 깔려있던 셈이다. <방문자>(2006) <반두비>(2009) 등 사회 비판 의식이 뚜렷한 영화를 연출한 신동일 감독의 의견도 비슷하다. “기존 언론의 기능이 제한되면서 국민들의 알 권리가 억압된 측면이 있었다. <두 개의 문> <부러진 화살> <도가니> 등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품들이 해소해주는 기폭제 역할을 대신했다. 사회적으로 축적된 불만의 토대가 흥행의 바탕이 된 것이다.”

기존 언론의 시각에서 보자면 용산 참사나 석궁사건, 광주 인화학교의 성폭력은 이미 지나간 사안이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종료된 사건이 아님을 보여주는 지표는 이들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역설한다. <두 개의 문> <부러진 화살> <도가니>의 공통점은 일반적인 영화 흥행 추이와 달리 개봉 일수가 더할수록 상영관 수와 관객 점유율이 늘어났다는 데에 있다.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 하나는 언론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망각이 다수 국민의 무관심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야말로 보도와 고발의 속성을 공유하는 무비 저널리즘이 기존 저널리즘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라 할만하다    

기존 저널리즘과 다른 점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는 이들 영화들을 찾는 관객들, 특히 <두 개의 문>의 관람 방식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는 <두 개의 문>이 “다큐멘터리의 장르를 넘어 기억의 박물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용산 참사에 관한 영화로 재구성된 일종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관람이 아니라 재구성된 사건의 체험장을 방문한다. 국화를 들고 극장을 찾는 행위 말이다.” 이러한 관람성의 변화는 용산 참사의 진실을 향한 대중의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두 개의 문>과 같은 사회비판 다큐멘터리는 창작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다루는 이야기를 더 많은 관객에게 알려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매체다. 이 말은 이미 그 전에도 다큐멘터리가 사회 고발의 기능을 해왔다는 의미다. 사실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 저널리즘의 속성을 지닌 매체다. 다만 다큐멘터리 중에서도 <두 개의 문>에 대해서만 유독 무비 저널리즘의 가능성 운운할 수 있는 건 사회적 파장의 유무다. 그 어떤 다큐멘터리도 <두 개의 문>의 경우처럼 관객이 직접 극장 상영을 요구할 정도로 국민적인 관심사의 반열에 오른 적은 없었다.

<두 개의 문>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지우고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 보도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국민적인 관심을 일으켜 사회적 담론으로 확장하는 일련의 과정은 기존 언론의 작동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무비 저널리즘을 저널리즘과 구별할 수 있다면 이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두 개의 문>이 보여주는 용산 참사의 영상은 소스를 제공받아 재활용하는 쪽이다. 기존 언론이 사건을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해 이를 보도하는 쪽이라면 무비 저널리즘은 이미 존재하는 자료(영상, 신문기사, 법원 판결문 등)를 가지고 여기에 관계자들의 다양한 인터뷰(다큐멘터리의 경우)와 재연(극영화의 경우)을 덧붙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는 “무비 저널리즘 이전 문제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선, 성찰, 서술 방식의 고민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두 개의 문>에 의미를 부여한다. 장일호 기자도 이와 똑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다큐멘터리가 꼭 현장에 나가 부대끼면서 찍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저널리즘도 마찬가지이지만 다큐멘터리에도 고정된 형식이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을 깰 때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두 개의 문>은 그 지점에서 신선하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편견을 넘어섰기 때문에 무비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가 표현했던 ‘기억의 박물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두 개의 문>이 아프리카TV에서 제공받은 영상은 말하자면 지나간 사건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 그것을 ‘무비’라 부르는, 일종의 박물관에 전시하는 <두 개의 문>의 형식이야말로 무비 저널리즘의 핵심이다. 무비 저널리즘은 곧 기억을 불러들이는 방식의 다른 이름이라 할 만하다. <두 개의 문>처럼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해당 변호사의 사건 기록과 소설로 각각 재구성의 방식을 취하는 극영화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무비 저널리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무비와 저널리즘의 보완 관계

물론 다큐멘터리인 <두 개의 문>과 극영화인 <부러진 화살> <도가니>가 사안을 다루는 방식에는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두 개의 문>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굳이 가리지 않으면서 이들 모두를 국가 폭력의 희생양으로 묘사하는 반면 <부러진 화살>과 <도나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편 가르기가 확실하다. 다소 거칠게 구분하자면, <두 개의 문>이 다큐멘터리로서 사실 전달에 충실하다면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는 극영화답게 현실을 과장되게 극화하는 쪽이다. 그렇다고 <두 개의 문>의 시각이 중립적이고,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는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동일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다큐멘터리가 중립적이라는 건 신화다. 창작자의 시선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극영화도 마찬가지다. 다만 극영화의 미덕은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이라고 본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는 나름의 영역을 가지면서 모호한 측면이 존재하는데 고유의 영역을 유지하면서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야말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모든 영화는 창작자의 시각이 전제되고 개입되는 가운데 영화 자체가 생산자들의 입장을 증명하는 증거 역할을 한다.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면 다수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당하거나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언급한 세 영화가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에 내재한 욕망을 반영한 결과다. 가령, <두 개의 문>은 용산 참사에 대한 진실을,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도가니>는 아이들을 노리갯감 삼는 못된 어른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극 중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욕망의 정체로 삼는다. 이들 욕망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어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였다. 여기에 이들 영화들이 불을 붙여 흥행으로 이어진 결과인 것이다. 다만 의문은 그것이 왜 영화라는 매체인가 하는 점이다. 용산 참사만 해도 시인, 화가 등 예술가들의 저항이 전방위적으로 있어 왔고 <도가니>도 동명의 원작소설이 있었지만 영화만큼의 폭발력을 갖지는 못했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이를 영화와 저널리즘의 보완 관계로 설명한다. “언론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팩트로 보도한다. 하지만 용산 참사의 경우, 이후 벌어진 재판이 엉망이었고 그에 대한 기록이 부분적으로 공개되다보니 언론이 이를 팩트로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차적으로 언론이 이 사건을 알렸다면 이후 증폭된 궁금증에 대한 해소가 무비 저널리즘의 역할이 되었다.” 사실 언론의 꽃이랄 수 있는 르포가 거의 사라진 배경에는 인력과 의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 사회가 특정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 정도로 폐쇄적인 구조라는 또 하나의 ‘팩트’가 놓여있다.

이런 조건에서 중립적인 시각이란 말 자체가 이미 불순한 의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각자의 영역을 허물며 각각 재구성(<두 개의 문>)과 취재를 통해 극화된 소설(<도가니>), 사건 기록이라는 일차적인 소스(<부러진 화살>)로 서로의 경계를 취하는 건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배경에 깔려있다. 인내가 요구되는 전통적인 르포가 사라진 언론의 부재한 지점을 제작기간이라는 보장된 시간을 장점으로 삼는 무비 저널리즘이 채우고 있다. 그 결과, 언론이 촉발시킨 궁금증을 영화가 해소하다보니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리는 것이다.

무비 저널리즘의 역할

그럼 남게 되는 마지막 질문(들). 세상이 좋았다면 무비 저널리즘의 출현은 없었을까. 아니 더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이번 정권이야말로 무비 저널리즘이 출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요’이다. 무비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높였을지 몰라도 이번 정권이 무비 저널리즘을 부른 것은 아니다. 이미 노무현 정권에도, 김대중 정권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비판의식으로 무장한 다큐멘터리스트들은 사회의 검은 안개에 빛을 비추어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친화적인 성향의 체재는 끊임없이 모순을 만들기에 그만큼 무비 저널리즘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한 질문은 이렇게 바꾸는 편이 옳다. 무비 저널리즘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 장일호 기자는 “물증이 없으면 물음표라도 남겨라, 아젠다를 던져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무비 저널리즘의 일차적 목표는 특정 사안을 알리고 의견을 모아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의 발언은 모두 무비 저널리즘이 사회의 모순에 대한 고발을 넘어 대안까지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고발에 충실하면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 속에서 대안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안 그래도, 관객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문>의 경우, 영화를 관람한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용산 참사의 진실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또한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를 향한 이 사회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도가니>의 경우, 영화 속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한 ‘도가니 특별법’이 제정되었을 정도다. 이를 무비 저널리즘의 저력이라고 포장할 생각은 없지만 무비 저널리즘이 이 사회의 건강한 긴장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무비 저널리즘의 가능성이 대두된 배경에는 더 좋은 세상을 욕망하는 이들의 집단적인 바램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movieweek
NO.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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