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타주>(Sabotage)


우리가 히치콕의 <사보타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얼마나 될까? 사전을 클로즈 업(close up)하여 제목을 소개한 그 유명한 도입부를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영화 <펄프 픽션 Pulp Fiction>에 차용했다는 정도. 아니면 히치콕의 영화치고는 소개가 너무나 덜 되어 있어 평가가 낮은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 그 몇 가지가 아닐까.


실제로 <사보타주>는 히치콕의 명성에 비해 그리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제목이 주는 전복적인 힘만큼 인상적이지 못 하다. 전등 신(scene)과 가로등이 비추는 밤거리를 교차 편집하여 사보타주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표현한 도입부 장면은 간결하면서도 아주 강렬하게 그 뜻을 전달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혼란을 보여주는 극장에서의 환불소동은 사보타주에 대한 반응치고는 너무나 얌전하여 앞 장면에서 보여준 이미지의 크기만큼 효과를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이 신사의 나라로 통하는 영국의 국민성이든 히치콕의 표현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 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 할 수 없지만 상징과 실제간의 연결이 끊기는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상의 결점도 발견이 된다. 벨록(오스카 호몰카 분)의 정체가 탄로 나고 테드(존 로더 분)가 경찰임이 밝혀진 상태에서 벨록의 심부름이라며 물건(실은 폭발물)을 들고 나가는 스티브(레스몬드 테스터 분)를 그냥 내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벨록과 관계된 일이 사보타주였으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집 주위에 경찰까지 보초로 세워 놓았던 상황이라면. 원작인 조셉 콘라드의 <비밀 정보원 The Secret Agent>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살해장면을 위해 벨록 부인과 벨록만을 남겨놓은 각색과정에서 설득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실패는 히치콕의 말에 따르면 극중 벨록 부인의 동생 스티브를 죽인 것이었다고 한다. 폭발시간을 극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런던을 배회하는 스티브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부각시키다보니 폭발이 가져다 줄 긴장감보다 오히려 관객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혹시 장면 하나에 어떻게 분노까지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독자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의 60∼70년대 영화관객들을 끌어들이자면, 그들은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당시 활동사진이라고 불리던 영화를 보는 한국사람들에게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속 이야기를 실제인양 착각 슬픈 영화가 상영되던 극장이 온통 눈물바다를 이룰 정도였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영화가 대중화 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1936년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윤리적인 문제에 상당히 적극적인 개입을 보이는 영화에서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글쎄 1930년대의 정서 상 꽤 위험한 표현에 속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보타주>는 몇 가지 점에서 수작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히치콕도 사람인 이상 언제나 좋은 영화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 대신 <사보타주>에는 그런 단점들을 감싸안을 많은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우선 서두부분에서 언급한 사전장면을 들 수 있겠다. 그럼 왜 사전까지 끌어들여 제목을 강조했을까? 말 그대로 사보타주가 가지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 ‘개인이나 단체 혹은 사회불안을 야기 시키려는 파괴행위’를 부각시키려 한 까닭이다. 연출력 자체가 도입부의 의도에는 못 미쳤지만 후대에까지 모방될 정도면 성공적인 셈이다.


시각적인 효과가 빛을 발하는 장면들도 있다. 벨록이 수족관에서 내키지 않은 임무를 받은 후 화면과도 같은 어항을 바라보자 그 어항이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곧 이어 파괴되는 장면, 폭발시간이 다가왔음을 보여주기 위해 태엽이 돌아가는 모습을 겹치게 한 장면은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장면 속의 소리를 지워도 이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보타주>가 나름대로 의미를 갖게 하는 부분은 벨록부인이 벨록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우선 벨록부인과 벨록의 숏(shot)을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팽팽한 대립구조를 완성한다. 그리고 벨록부인의 미디엄 숏(midium shot: 등장인물의 허리나 무릎 위를 비추는 숏)에서 팬(fan: 카메라가 상하 혹은 좌우로 움직이는 것)한 카메라가 칼을 포착하고 이어 벨록의 얼굴을 비추어주면 그 칼은 살인에 대한 기능성을 확보 하게 된다. 이 장면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사가 아닌 보여줌으로서 칼의 기능을 관객에게 전달하여 살인장면을 긴장감 있게 잡아내었다는데 있다. 벨록부인의 살인장면을 통해 몇몇 평론가는 선한 사람도 충분한 동기가 갖추어질 경우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히치콕의 관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살인 시퀀스(sequence)는 전통적인 남녀관계에 대한 일종의 사보타주(?)로 볼 수 있다. 폭발계획을 지원하였던 새장주인이 부인에 의해 협박당하는 장면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는 남성(테러집단)을 그린 결말부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문제는 히치콕의 영화치고는 상당히 밋밋하며 벨록부인과 경찰인 테드가 사랑을 이루는 설정이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히치콕의 <사보타주>를 통해 우리는 거장이라고 해서 항상 걸출한 작품만을 발표하지는 않으며 또한 거장이 만든 평범한 작품일지라도 그 안에는 거장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적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P.S. 영화의 크레딧을 유심히 살펴보면 cartoon sequence by arrangement with and thank to Walt Disney 라고 쓰여진 문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스티브가 죽은 사실을 알고 벨록부인이 영화를 보며 슬퍼하던 장면에서 상영되던 디즈니의 <Who Killed Cock Robin?(1935)>의 장면제공에 대한 언급이다. 그럼 스티브는 누가 죽였을까?


(2001. 8. 25.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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