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난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 살인은 최소로 공포는 최대로



요즘 호러매니아들이 고어/스플래터 영화를 즐겨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살을 찢는 살인의 잔혹함과 난자 당한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강렬함에 매료를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더욱 잔인한 피의 미학을 원하고 있으며 그에 부응하여 호러영화들은 더욱 살벌한 방법으로 더 많은 양의 피를 양산하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얼마나 특이한 살인방법을 택해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느냐에 따라 그 영화의 작품성(?)이 평가받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호러장르의 유행을 부추긴 선구적인 작품들은 대개 살인장면이 빈번하지도 않으며 피의 양도 매우 소량(?)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샤워실 살인 장면으로 유명한 <사이코>만 하더라도 살해당하는 사람은 마리온과 아보가스트 단 2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굉장히 무섭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살인 그 자체의 행위보다는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축적해놓은 긴장감 덕분이고, 최고의 스릴러 영화로 자리매김한 사실은 난도질 영화의 원안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조지 A. 로메로의 저 예산 흑백필름 <살아난 시체들의 밤> 역시 그리 많은 살육장면과 혈흔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후에 나온 작품에 새로운 좀비의 전형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여타의 공포영화와는 달리 시대의 아픔을 기호로 상징화하여 담아낸 특별한 설정과 남다른 의미로 인해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추앙 받고 있다.

2. 좀비의 원형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는 <살아난 시체들의 밤>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년 전인 1966년 존 길링 감독은 <The Plague of the Zombies>를 들고 나왔고, 더 일찍이 1932년에는 드라큐라 전문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 벨라 루고시가 출연한 <White Zombie>가 있었다. 엉성한 영화의 대가 에드우드가 만든 <외계에서의 9호 계획(Plan 9 from Outer Space)>도 좀비가 나온 영화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들 영화가 관객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 시체로 묻혀있던 좀비들의 부활에 공포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조지 로메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좀비들의 행동을 완성하였다. 좀비의 공격을 받아 살해된 사람들이 좀비로 되살아나는 부활성, 시체를 뜯어먹는 공격성 그리고 불을 무서워하며 머리에 충격이 가해지면 생명을 잃는 치명성은 후에 나온 모든 좀비 영화의 일원화를 일군 결정적인 특징이다.

3. 신(新) 공포영화

일반적으로 공포영화는 갖은 살해의 공격을 받은 주인공이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간신히 살아남는 해피엔딩의 결론을 취한다. 이는 영화를 ‘보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살인마보다 쫓기는 자의 감정에 쉽게 이입되는 관객의 심리를 노린 스튜디오의 뻔한 전략이다.


살아남은 줄로만 알았던 최후의 생존자가 좀비로 오인 받아 사살 당하는 <살아난 시체들의 밤>의 결말부는 주인공과 나(관객)의 심리를 일치시킴으로써 은연 중에 해피엔딩을 바라던 관객의 기대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발상이다. 이 장면은 주인공을 흑인으로 설정한 점과 더불어 영화가 장르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감독만의 영화문법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지 관객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필요이상의 자극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다.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어떤’ 메시지를 상징화하기 위해서 감독에게 위의 설정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을씨년스러운 묘지를 배경으로 휘날리는 성조기의 모습은 분명 미국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조준하는 목표물이 다름 아닌 아버지 세대임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 온 바바라(주디스 오데어 분)와 조니 남매의 불평 섞인 대화에서 눈치챌 수 있다.


곧이어 이들 남매는 좀비의 공격을 받아 조니는 목숨을 잃고 바바라는 외딴집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바바라는 벤(듀안 존슨 분)과 쿠퍼, 그의 부인, 정신을 잃은 딸, 젊은 연인 한 쌍을 만난다.

4. 좀비의 살인이 의미하는 것


좀비의 살인행위는 흔히 공산주의의 공격 혹은 빨갱이 사냥에 열을 올린 매카시즘의 광기로 읽혀지곤 한다. 그러나 <살아난 시체들의 밤>의 등장시기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무리하게 베트남전을 감행하여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미 제국주의자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좀비(미 제국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젊음을 주인 없는 집(베트남)에 몰아넣고 잔인한 공격을 가한다.


집안에 피신해 있는 이들의 면면도 예사로운 구성이 아니다. 백인남성인 쿠퍼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잘 알다시피 미국사회에서 보잘 것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흑인 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주인공 바바라는 영화 내내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벤의 큰소리가 있을 때에만 간신히 도움을 줄 뿐이다. 언제나 사회적으로 남성에게 억눌려있는 여성의 지위를 상징한다. 연인사이인 탐(키스 웨인 분)과 주디(주디스 리들리 분)는 베트남으로 파병된 젊은 영혼이고 그의 애인, 친구이다. 그래서 이들은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 집밖으로 나섰다가 희생당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받은 당시 젊은이들의 암울한 초상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을 지배하는 인종이자 권위적인 아버지 쿠퍼. 그는 벤이 앞장서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는다. 벤의 의견에는 무조건 반대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자신만의 주장을 내세운다. 부인에게도 권위적으로 군림하려 든다. 그래서 그의 부인은 쿠퍼에게 “당신이 옳으면 모두가 틀린거니까”라고 냉소한다. 심지어는 가족을 핑계로 벤을 위험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는 문제의 핵심은 파악할 줄 모르며 권위만을 내세우고 가족을 볼모로 타인을 짓밟는 비겁한 존재이다. 결국 쿠퍼는 벤에 의해 목숨을 잃고, 그런 부모를 둔 자식들의 분노는 부모를 부정하기에 이른다(쿠퍼의 딸에 의해 살해당하는 어머니). 가족의 가치는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다(동생 조니에 의해 살해당하는 바바라).


이 밖에도 은유적인 미국사회의 폭로는 여러 상황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시체가 되살아난 원인으로 위성의 추락에 따른 방사능오염을 지적한 TV보도는 우주탐사의 첫 스타트를 소련(러시아)에 빼앗겨 안절부절 못하는 미국 우주계획의 허황됨을 비웃은 설정이다. 또한 정부의 입장을 고스란히 방영하는 TV의 보도 행태는 미디어의 정부 대변자적 성격을 고발한 것이다.


민방위대의 존재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좀비를 제거하기 위해 정부는 민방위대를 조직한다. 그들은 좀비가 눈에 띄는 즉시 사살해버린다. 마치 살인 게임을 즐기는 듯한 민방위대의 행위는 수많은 베트남의 인명을 살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미국의 추악한 얼굴이다. 물론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으로도 치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방위대는 되살아난 좀비로 보아도 무방하다. 종국에는 간신히 살아남은 공포영화 최초의 흑인주인공 벤마저도 살해한다. 흑인의 주도적 행위를 용납치 못하는 백인세력의 뒤틀린 인종차별적 사고에 대한 상징이다. 실제로 영화 속 민방위대 안에는 흑인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좀비 뿐 아니라 흑인도 사살의 목표물로 삼은 것이다.

5. 적은 제작비로 인해 가능했던 영화


다층적인 상징성의 이야기는 열악한 제작환경이 한 몫 하였다. 고작 11만 4천 달러에 불과한 제작비의 한계를 아이디어로 극복하기 위해 감독은 집안에 고립되어 이유 없는 적들의 공격을 받는다는 설정을 히치콕의 <새>에서 빌려왔다(후에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시리즈에서도 차용되었다). 카메라의 앵글이 집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현명한 처사였다. 이와 더불어 흑백필름의 사용은 <살아난 시체들의 밤>이 부각시키는 대립구조인 생과 사의 갈림, 신구세대의 갈등, 미·소의 대결, 인종간의 충돌 등 필름의 이원화된 색상과 적절히 맞아 떨어져 허구와 현실 속의 단순화된 흑백논리를 효과적으로 재현하였다.

6. 공포의 실체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거짓 삶에 대한 공포이다’고 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공포의 극한이라는 것이다. 조지 A. 로메로가 보여준 공포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진정한 가치가 부재한 미국이 어떻게 개인과 가족의 삶을 무너뜨리는지 좀비라는 ‘도구’를 사용해 묘사하였다. 그 결과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살아남지 못하는 지옥 바로, ‘희망 없음’의 공포이다. 겉으로는 세계 최고의 국가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내부로는 치료책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곪아버린 1960년대 후반 미국의 거짓 삶이 얼마나 기반이 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이었는지 <살아난 시체들의 밤>은 충분히 가늠케 한다.

p.s. <살아난 시체들의 밤>을 리메이크한 <리빙 데드 4>가 1990년에 제작되었다. 조지 로메로가 각본으로도 참여한 이 영화는 전편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오빠에게 잡아먹혔던 바바라가 <리빙 데드 4>에서는 최후의 생존자로 남아 목숨을 부지한다는 사실이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겨놓지 않음으로써 미국사회에 대한 절망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로메로가 20년 사이에 미국사회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본 것일까? 무척 궁금하다.


(2001. 7. 29.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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