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


모 영화주간지의 리뷰를 보면 <진주만 Pearl Harbor>의 연출배경에 관한 흥미로운 지적이 나온다. <진주만>의 모태가 되는 <도라 도라 도라>가 진주만 공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에만 치중하다 보니 인물을 죽였다는 것이다. <진주만>의 고루한 삼각관계의 멜로는 인물이 죽어버린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전한다.

인물을 죽였다? 얼핏 과격해 보이는 이 표현은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주인공의 부재를 뜻한다. 정확한 지적이다. 실제로 <도라 도라 도라>에는 주인공이 없다. 주연으로 소개되는 마틴 발삼조차도 주인공으로서의 특권인 성격묘사에 할애되는 에피소드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저 미국진영의 진주만을 책임지고있는 해군사령관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존재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도라 도라 도라>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진주만 공습을 묘사하기 위한 소품으로써 ‘1941년’이라는 배경세트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없는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20세기에 발생한 무수한 전쟁 중에 세계 2차 대전만큼 아군으로 지칭되는 선(Good)과 적군으로 지칭되는 악(Evil)에 관한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된 전쟁은 없었다. 일본과 독일의 자국 패권주의를 위해 벌이는 움직임들은 모두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반역행위였다(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그중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이자 평화를 수호하는 미국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선악의 편가름을 더욱 견고히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자만에 빠져있던 미국을 결속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 동시에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군에 가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극적인 요소들이 산재한 이야기 거리를 헐리웃은 놓칠 리 없었다. 전쟁이 내포하는 비극적인 드라마와 위험을 딛고 끝내 평화를 사수하는 미국의 모습은 스크린을 수놓을 훌륭한 재료들이었다. 문제는 선과 악이 뚜렷하다보니 단지 관객의 감정선을 고취한다는 이유만으로 감상적인 애국심에 사로잡혀 미국의 행동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결국 왜곡된 사상전파가 거리낌없이 자행되는 헐리웃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전쟁을 바라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미국과 일본은 양측의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도라 도라 도라>를 제작하였다.

허를 찌르는 작전구상과 일본인 특유의 철저한 준비과정을 통해 진주만을 습격하는 일본측의 시퀀스는 마쓰다 토시오와 후카사쿠 긴지(배틀로열을 연출한 그 감독이다)가 담당하고, 군 부처간의 자존심을 내세워 경계의 빈틈을 드러내는 미국측 시퀀스는 리처드 플라이셔가 맡음으로써 헐리웃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한 영화가 되었다. 애시당초 감상의 저울추가 피해자의 복수극을 유도할 여지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러한 <도라 도라 도라>의 현명함은 첫 장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 태평양 함대는 일본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이 공격은 미국을 2차대전에 가담케 했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오프닝 멘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영화가 최대한의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서술했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라 도라 도라>가 나아갈 지향점은 딱 한가지.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를 이용하여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진주만 사태의 본질을 바로잡아 올바른 ‘정보제공’의 기능을 하는 것. 그 결과 <도라 도라 도라>는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짙은 영화 아닌 영화가 되었다. 이는 일본과 미국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필연적 결과물이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아 필름에 옮겨 담는 작업을 다큐멘터리로 정의한다면 <도라 도라 도라>는 분명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영화의 태생을 버리지 않은 것은 진주만 폭격 장면을 그럴싸하게 재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수 효과 부문(1971, Best Effects, Special Visual Effects)을 수상한 경력이 말해준다. 물론 1970년의 기술적 성과가 현재에 미치지 못했던 시대임을 감안하였을 때 폭탄시점을 도입하여 전쟁의 현실감을 높인 <진주만>의 눈높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도라 도라 도라>의 그것도 당시로서는 생생한 것이었다. 이 같은 특수효과야말로 영화만이 가지는 고유의 권한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들은 이처럼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두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르쳐 <도라 도라 도라>의 장점을 단점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물론 틀린 지적은 아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는 이 프로젝트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다 인물은 없고 사건만이 남은 <도라 도라 도라>에 생명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감독직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를 들어 <도라 도라 도라>를 흠집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갈 때까지 가버린 미국식 패권주의가 판을 치는 이 마당에 중립을 지켰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도라 도라 도라>가 보여주는 장점의 미덕은 여전히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PS. 영화의 제목인 도라 도라 도라는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였을 경우 외치는 일본군의 암호이다.


(2001. 6. 22. <딴지일보>)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