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가 배출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어네스트 레먼


<글래디에이터>에게 최우수작품상을, 그리고 감독상에 스티븐 소더버그를 선택하여 이상적인 수상의 묘를 발휘한 73회 아카데미는 올해도 부문별 최고 수상작과 수상자를 가려내 막강한 헐리우드의 위용을 과시하였습니다.

<트래픽>, <와호장룡>, <글래디에이터> 3강이 펼친 격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측 불가능의 즐거움을 선사하였고, 붉은 카페트를 수놓은(red carpet show) 스타들의 옷차림과 무대세트의 화려함은 여느 블록버스터 못지 않게 대규모였으며 관객동원 능력또한 전 세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존재하는 법. 영화의 주연과 엑스트라의 대접이 하늘 과 땅 차이듯 아카데미의 주요 5개상 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주연, 각본 부문이 열띤 호응 속에 환대를 받은 것과는 달리 기술상 부문등은 조용히 진행되어 극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음향상 수상 발표자로 나온 마이크 마이어스는 “온 세계가 주목하는 발표시간이 돌아왔다”며 비관심 부문의 초라함을 역으로 증명 하여 빈축을 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평생 공로상(Honorary Academy Award)의 경우도 그 중요성에 비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물론 엘리아 카잔의 경우처럼 동료를 공산당원으로 고발했던 전력으로 공로상 수상여부에 관해 시끄러웠던 작년의 사례가 있긴 합니다만 대개 주요 관심사라면, 주연상은 어느 배우며 작품상은 무슨 영화인가에 집중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공로상만큼 중요한 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헐리우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올해의 공로상은 영국출신의 촬영감독 잭 카디프(Jack cardiff)와 어네스트 레먼(Ernest Lehman)에게 돌아갔습니다. 특히 ‘영화는 각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며 수상소감을 밝힌 어네스트 레먼은 헐리우드가 배출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점은(당사자에게는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겠지만) 미국작가협회(Writers Guild of America)로부터 5번의 최고 각본상과 함께 명예상(Laurel- Award for Achivement)까지 거머쥔 화려한 수상경력의 레먼이지만, 아카데미에서만큼은 철저히 외면 당해온 사실로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1954년 <사브리나>를 필두로, 1959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61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66년 <Who’s afraid of Virginia Wolf?> 무려 4편을 각본(색)상 후보에 올려놓았으나, 단 한 개의 오스카도 레먼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 하였습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경우는 경악 할 만합니다. 10개 부문이 후보에 올라 무려 9개의 트로피를 수상하였지만 유독 각본만이 누락 되었음은 그와 아카데미의 끈질긴 악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신들은 보수성 짙은 아카데미와 관련한 레먼의 공로상에 대해 무척 뼈 있는 머릿기사로 수상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아카데미, 화해의 오스카 트로피로 46년간 이어온 어네스트 레먼과의 불화에 종지부를 찍다”

<The Inside Story>로 시작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레먼을 살펴보면 한 장르의 집착 없이 여러 장르를 횡단하며 필력(筆力)을 과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이력 안에는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이 된 오드리 헵번 주연의 <사브리나>가 있는가 하면 007 시리즈의 모태가 된 첩보 스릴러물인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도 있습니다. 1966년에 만들어진 <Who’s afraid of Virginia Wolf?>는 가학으로 사랑을 느끼는 부부를 통해 당시 가장 불경스러운 영화라는 평과 함께 언론의 비난을 받았지만 평단의 혹평과는 무관하게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 해 아카데미 각본은 물론 총 12개 부문이 후보에 오른 작품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연극의 노래와 춤을 이야기 중심의 영화로 옮긴다는 일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먼은 헐리우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사운드 오브 뮤직> 등 뮤지컬 장르에서 여러 번에 걸쳐 뛰어난 각색의 재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브로드웨이 흥행실패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영화화되어 천문학적 흥행수입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뮤지컬로 화려한 이력의 정점에 도달한 그였지만 추락을 부른 장르도 뮤지컬이었습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뮤지컬 스타 진 켈리가 감독을 맡고 레먼이 시나리오에 제작까지 참여한 <Hello Dolly!>는 엄청난 물량의 돈과 대규모의 인원이 투입 되었음에도 흥행에 참패하여 장르의 소멸을 부추겼고, 레먼 개인의 이력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은 이 후의 <패밀리 플롯>, <블랙 선데이> 등 일련의 작품 들이 호응을 받아내지 못한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먼은, <프렌지>의 성공 이후 역시 오랫동안 침체되어있던 히치콕과 합심하여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설 <The Last Days>를 각색한 <The Short Night>에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나리오 초안을 완성한 레먼 자신은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설상가상으로 <The Short Night>을 다시 손보던 중 히치콕의 죽음까지 겹쳐 이 60세의 노인은 <블랙 선데이>를 마지막 영화작업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스크린에 실현하지 못 하였습니다.


(2001. 5. 23. <무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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