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가 사라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펙트 게임> <마이웨이> <페이스메이커> <댄싱퀸> 등과 같은 최근 한국영화의 기대작들은 끝까지 보고 있기가 심히 민망할 정도다.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등 할리우드 공세에 맞선 한국영화들이라고 나름 많은 언론에서 밀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하향 평준화된 한국 주류영화의 흥행 공식, 딱 한 줄 정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최동원과 선동렬의 15회 완투 무승부’ ‘조선과 일본 두 청년의 국적을 초월한 인간애’ ‘완주해서는 안 되는 국가대표 마라토너’ ‘서울시장 후보의 아내가 댄싱퀸’)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감정을 강요하는 식의 연출을 극대화한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영화 모두 나름 훌륭한 영화적 소재를 취하고도 스크린에 적합한 연출이 아닌 TV에서나 볼법한 만듦새를 보인다는 점이다. <퍼펙트 게임>과 <페이스메이커>는 TV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감상하는 듯, <마이웨이>와 <댄싱퀸>은 이야기의 설득력과 감정의 고조가 실종된 TV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뜨리는 것이다. 감정의 청룡열차에 관객을 실어 나르는 놀이공원 식의 조작은 있지만 스크린만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영화적인 연출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흥행의 가치가 최고의 덕목으로 받아들여지는 주류영화계의 풍토를 감안하더라도 ‘몽타주 Montage’와 같은 영화 편집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창조적인 요소가 거의 방기되고 있는 건 심각할 정도다.  

장면과 장면을 이어 붙여 의미를 생성하는 편집을 두고 흔히 몽타주라고 한다. 갈구하는 남자의 얼굴 장면과 밥그릇 장면을 이어붙이면 ‘굉장히 허기진 남자의 상태’라는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몽타주는 관객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기법 중의 하나다. 그런 몽타주가 사라졌다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를 더 이상 해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가운데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대다수의 영화감독들은 현실을 환기시키기보다 현실을 잊게끔 만드는 연출을 흥행의 취우선 덕목으로 삼는다. <마이웨이> <퍼펙트 게임> <페이스메이커> <댄싱퀸>이 바로 그렇다. 몽타주 대신 관객들에게 생각할 틈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 잘게 쪼갠 컷들을 활용, 세세한 설명을 가져가는 것이다.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몽타주를 활용하기 좋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퍼펙트 게임>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최동원(조승우)과 선동렬(양동근)의 대결은 단순히 라이벌 이상의 관계를 넘어서는 배경을 갖는다. 연대/영남/롯데 vs 고대/전남/해태와 같은 학연, 지연, 기업연을 등에 업은 구(舊)영웅과 신()영웅의 일종의 대리전으로써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충돌의 몽타주를 통해 시대적 의미를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좋은 거리를 애써 무시하고 15회 완투 무승부 경기에 상당 시간을 할애하여 그 날의 경기를 요약하는 연출은 감독의 직무유기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건 나머지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대립하던 한국인과 일본인이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는 <마이웨이>나, 엘리트 마라토너의 금메달 수상을 위해 옆에서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레이스를 돕는 페이스 메이커의 인간승리를 그린 <페이스메이커>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서울시장 후보 남편과 걸그룹 지망생 부인의 소동극을 다룬 <댄싱퀸>이나 대립하는 인물들의 사연을 가지고 몽타주를 활용하기 좋은 구조들로 충만하다. 하지만 이들 영화 역시도 최소 두 컷으로 가능한 몽타주로 관객을 사고하게 만들기보다는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잘은 편집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과 같은 과도한 수식을 통해 눈과 귀로 대표되는 감각기관을 현혹한다. 그렇게 한두 개로 가능한 컷을 대여섯 개로 나눠버려 쓸데없이 상영 시간을 늘려버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마이웨이>다.  

일제강점기, 러일전쟁, 노르망디 전투와 같은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준식(장동건)과 타츠오(오다기리 조)의 관계는 드라마틱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애증의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 영화가 힘을 주는 부분이 고작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 밖에 없다는 것은 감독의 의도를 의심케 한다. 강력한 볼거리를 통한 영화적 마취. 전작 <태극기 휘날리며>(2003)에서 유사 할리우드 영화의 의심을 샀던 전투 장면을 감안하면 볼거리 강화보다 인물의 관계 묘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거대 제작비의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었음은 자명하다. 원수 사이에서 서로 의지하는 친구 사이로 전환되는 분위기 조성이 설득력을 가져야 성립하는 영화였던 만큼 전투 장면은 볼만했지만 이야기가 헐거웠다는 대개의 평은 <마이웨이>의 실패를 에둘러 지적한 수사학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마이웨이>가 준식과 타츠오의 영웅적 면모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변인물과 상황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다는 반증의 결과다. 이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쉬이 목격되는 부분이다. <페이스메이커>의 주만호(김명민)의 경우, 금메달 유망주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천사표로 그려진다. 영화는 일방적으로 주인공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전개하니, 그와 대척점에 선 인물들은 모두 비호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건 한국의 스포츠영화가 갖는 고질적인 한계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엘리트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이 노골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금메달이 기대되는 민윤기(최태준)는 잘생긴 외모와 정상급 실력을 갖췄지만 안하무인격의 인간성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그와 달리 주만호는 동료의 업적을 위해 자신의 성적 따위 연연해하지 않고 동생의 출세에 방해가 되는 스스로의 존재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관객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몽타주의 실종은 이와 같은 연출적 결과로 발생하는 후유증으로 설명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지만, 몽타주는 두 명의 인물 혹은 두 개의 상황, 또는 인물과 상황이 복수의 장면으로써 서로 동등하게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단수의 인물, 사물, 상황만 가지고 편파적으로 묘사해서는 애초에 성립이 불가하다. 주인공의 영웅적인 면모를 기리는 영화들이 대부분 간과하는 것인데 주인공에게 모든 걸 맡겨 버리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댄싱퀸>이 황정민(황정민)과 엄정화(엄정화)를 묘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들을 제외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단선적으로 묘사된다. 이들 부부가 각각 인권변호사와 서울 시장, 주부와 댄스가수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갈등하고 고뇌하는 것과 달리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 커플의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기쁨과 슬픔 두 가지 감정으로만 반응할 뿐이다.

대신 이들의 영웅적인 면모를 설명하는 장시간의 컷 할애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까닭에 몽타주가 들어갈 편집의 타이밍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퍼펙트 게임>의 최동원과 선동렬 외에, <마이웨이>의 준식과 타츠오 외에 영화가 정말 애정을 갖고 관심을 두는 인물이 있던가. <퍼펙트 게임>의 김용철(조진웅)과 박만수(마동석)? <마이웨이>의 종대/안똔(김인권)? <페이스메이커>의 주만호를 지도하는 박성일 감독(안성기)? 조금 과장해서 이들의 존재를 영화 속에서 지워버리면 코믹과 감동 코드의 기온이 살짝 떨어질 뿐이지 주인공의 드라마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들은 주인공의 업적을 강화하는 액세서리이거나 관객의 불난 감정에 바람을 불어넣는 부채질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몽타주는 편집의 기교이기 이전 주변 인물과 상황 간의 균형을 잡아주는 무게중심이다. 주연과 조연과 엑스트라가 비중의 경감을 떠나 각자의 캐릭터와 나름의 배경을 갖고 어우러질 때 몽타주는 최소한의 성립요건을 갖춘다.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지상 목표로 삼는 극적인 감정 조성 또한 몽타주가 이뤄지지 않고서는 휘발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스포츠 하이라이트나 자극을 위해 전후 관계를 무시하는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광경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모두 그 꼴이다. 롯데의 최동원과  해태의 선동렬이라는 현대사의 몽타주가 왜 그들만의 이야기로 축소가 됐을까. 준식과 타츠오라는 역사의 비등점은 왜 인위적인 감정 조작으로 2시간 20분 만에 휘발되고만 것일까. 동료를 도와야 그 자신이 존재 가치를 갖는 페이스 메이커는 왜 그 자신만이 돋보이는 영웅이 되고 말았을까. 영화마저도 빈익빈부익부의 현실을 그대로 이식한 것은 아닐까. 스포츠와 드라마의 인기로 스크린의 인지도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가 이들 매체와 닮아간다는 것은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몽타주의 실종은 오래전부터 희망을 잃은 한국영화계의 어두운 현실을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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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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