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트 바이어런트> J.C. 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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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 챈더는 이제 고작(?) 3편의 영화를 연출한 신인급 감독에 속한다. 다루는 장르나 소재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장편 데뷔작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이하 ‘<마진 콜>’, 2011)은 2008년 미국의 금융 위기를 다룬 금융 스릴러다. <올 이즈 로스트>(2013)는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의 사투를 그린 재난 스릴러다.

그런데도 미국의 많은 영화평론가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감독으로 단연 J.C. 챈더를 꼽는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철저히 외면했지만, 2014년의 중요한 영화 중 하나이자 J.C. 챈더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는 <모스트 바이어런트>가 그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현대의 코폴라 혹은 드 팔마

<모스트 바이어런트>도 J.C. 챈더의 앞선 작품들만큼이나 고색창연하다. 부패로 얼룩진 뉴욕에서 범죄 커넥션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폭력 신화의 이야기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 부부가 전면에 나서는 설정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1983)를 연상시킨다.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J.C. 챈더는 기회가 된다면 고전적인 느낌의 갱스터물을 만들고 싶었다. “<대부>와 <스카페이스>를 좋아하지만, 두 영화가 충분할 만큼의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기대할 법한 요소를 좀 더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모스트 바이어런트>를 만들었다.”

걸작 갱스터물의 유산을 계승하되 J.C. 챈더가 변화를 준 부분은 주인공 아벨 모랄레스(오스카 아이삭)다. 아벨은 <대부>의 돈 콜레오네나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태나처럼 폭력을 신봉하는 불한당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이 자신의 사업을 망칠까 거리를 두는 신사에 가깝다. 하지만 범죄율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81년 뉴욕에서 아벨처럼 합법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사업가는 뜯어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벨은 앞으로도 오일사업이 유망하리라 판단해 없는 돈을 끌어모아 대형 부지를 사들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잠시, 잇단 자사 오일 운반 트럭 강도 사건으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를 2년 동안 추적하던 검사가 16개의 범법 행위를 근거로 기소를 결정하면서다. 이로 인해 대출을 약속한 은행이 계약을 파기하고 그 여파로 아벨은 부지 잔금을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아벨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날 상황에서 아내이자 마피아의 딸인 안나(제시카 차스테인)가 은밀한 제안을 해온다.

절망의 우물 속으로 한없이 참전하는 아벨에게 안나가 내민 ‘손’의 설정은 J.C. 챈더의 전작 <올 이즈 로스트>의 마지막 장면과 묘하게 겹친다. <올 이즈 로스트>의 남자(로버트 레드포드)는 요트로 인도양을 항해하던 중 선적 컨테이너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남자는 생존 물품만 겨우 챙긴 채 고무보트로 몸을 피신한다. 지나가는 선적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불을 피웠다가 고무보트까지 잃게 된 남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 극적으로 구조의 손길이 등장한다. 남자는 그 손을 붙잡고 살아날 수 있었을까?

연출작은 몇 편 되지 않지만, J.C. 챈더의 작품을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그동안 미국이 겪은 부침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진 콜>은 금융 위기의 주역들이 어떻게 사태를 최악으로 키워 미국을 위기에 빠뜨렸는지 그 과정을 좇는다.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게 된 미국인들의 처지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몸을 뉘일 고무보트에 위태롭게 의지하는 상황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올 이즈 로스트>에서 남자의 보트를 망가뜨린 선적은 중국의 것으로 설정됐다. 금융 위기와 더불어 중국의 급부상으로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위협받게 된 미국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게 된 형편이 아닌가.

미국을 대표하는 미래의 거장

J.C. 챈더가 <올 이즈 로스트>를 마친 후 <모스트 바이어런트>를 준비하면서 극 중 시간적 배경을 1981년으로 설정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왜 폭력의 유혹에 빠지는지를 분석하려고 했다. 자연스럽게 뉴욕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한 해로 기록된 1981년의 범죄 통계에 주목했다. 뉴욕 시민들은 부패하고 거의 파산 직전인 도시에서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120만 건의 범죄가 기록된 가운데 살인 사건이 2천백 건, 강간이 5천5백 건, 그리고 가중 폭행이 무려 6만 건이나 됐다.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제일 나은 방법 중 하나는 범죄와 손을 잡는 것이다. <마진 콜>에서 J.C. 챈더가 주목했던 바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회사의 손해액이 시가총액을 넘어 파산될 위기에 처하자 중역들은 새벽 시간에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다. 곧 휴짓조각이 될 주식을 어떻게든 팔아넘겨 미국 금융시장이 쑥대밭이 되거나 말거나 자신들만 살아남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도덕적 해이는 <모스트 바이어런트>의 배경이 증명하듯 그 이전부터 미국 사회의 전통처럼 존재해 왔다.

물론 미국인들 모두가 처음부터 폭력과 부정을 신봉하지는 않았을 터다. 사회적 조건은 개인의 성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아벨 모랄레스의 이름은 예사롭지가 않다. 창세기에서 아벨은 형 카인에게 살해당했다.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진다. 그럼 아벨은 피해자인가? J.C. 챈더는 <모스트 바이어런트>에서 아벨의 성을 모랄레스로 지었다. 라틴 아메리카 출신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Moral’과 ‘less’를 합쳐 그 또한 이 영화에서는 카인과 다르지 않을 거란 암시를 중의적으로 담았다.  

아내 안나의 도움으로 부지의 잔금을 치르고 오일 사업의 유리한 고지를 점한 아벨 앞에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직원이 찾아온다. 아벨이 한때 총애했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지로 몬 직원으로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 그리고 감행하는 자살. 그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은 그대로 석유 탱크로 향하며 피와 오일이 섞이는 의미심장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과연 아벨은 합법적인 방식을 고수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J.C. 챈더는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갱스 오브 뉴욕>(2002)의 마지막 장면처럼 피와 오일이 섞인 이미지 위로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의 전경을 상징적으로 포착한다.

<올 이즈 로스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점으로 남자가 탄 구명보트의 바닥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깊은 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시적인 고요를 자아내는 것도 잠시, 포식자인 상어가 정적을 깨며 섬뜩한 순간을 연출한다. 그 속에 빠지게 된 남자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검은 손일지라도 붙잡는 것밖에는 없다. 그것이 아벨 모랄레스를 포함해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인간의 약한 고리를 공략해 폭력으로 위기를 조장하고 이를 지배 체계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가장 폭력적인 한 해 A Most Violent Year’를 경험한다. <모스트 바이어런트>는 1981년 뉴욕의 이야기이고 미국 폭력의 역사이며 서늘한 인간 보고서다. 그리고 J.C. 챈더가 왜 미국을 대표하는 감독인지를 밝히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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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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