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 감독이 영미권 배우와 함께 미국에서 작업한 첫 번째 영화다. 원래 니콜 키드먼과 함께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가 1947년 연출한 동명영화와는 관련이 없다!)을 작업하려 했지만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니콜 키드먼이 하차, 재즈뮤지션 노라 존스와 함께 새 프로젝트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찍게 됐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2001년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왕가위의 단편 <화양연화 2001>을 원전으로 한 작품. 장편 <화양연화>(2000) 이후 차우와 수 리첸이 홍콩의 식료품 가게에서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로, 양조위와 장만옥이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 왕가위 감독은 이 영화를 노라 존스에게 보여주면서 아이디어를 공유한 후, 배경을 미국으로 옮겨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완성했다. 식료품 가게 주인 양조위가 주드 로, 손님으로 출연한 장만옥이 노라 존스의 캐릭터가 된 것이다.
허나 2007년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최초 공개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대한 평가는 혹평에 가까웠다.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화양연화>를 패러디한 미국 감독의 영화처럼 보인다”는 노골적인 악평까지 나왔을 정도. 이후 왕가위 감독은 “극중 제레미의 내레이션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인다”는 이유로 내레이션 대본을 다시 구성했고, 111분의 이야기를 94분으로 줄여 현재의 버전으로 완성했다.
왕가위의 신작에 대한 가장 큰 궁금증은 홍콩 시절 작품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닮았고, 또 어떻게 다르냐는 점일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에 대한 사연을 사건이 아닌 캐릭터의 감정으로 진행하고 내레이션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드러내며 이를 감각적인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영락없는 ‘왕가위표’다. 반면 시간의 흐름이 아닌 지역의 이동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새롭다. 특히 남녀 주인공이 이뤄질 듯 말 듯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냈던 전작들의 결말과 달리 해피엔딩을 취한다는 점은 눈에 띄는 변화다. “타국의 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이 영화가 미국영화처럼 보이길 바랐다”는 의도가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철저히 미국인 캐릭터를 창조하길 원했던 왕가위는 홍콩과 달리 미국이 거대한 땅덩이를 가졌다는 점에서 여행하는 영화의 설정을 착안했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남자친구와 이별한 리지가 뉴욕을 떠나 멤피스와 네바다를 여행한 후 뉴욕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감정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는다. 영화가 4장으로 구성된 건 이 때문. 리지의 감정적인 궤도를 따라가는 이 영화에서 지역의 특성은 고스란히 그녀의 감정을 대변한다. 예컨대, 짐 자무시가 <미스테리 트레인>(1989)에서 보여줬듯 황량한 멤피스의 풍광은 연인과의 이별로 인해 허해진 리지의 심정에 다름 아니다. 네바다 사막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긴 방황 후 마음의 평안을 얻는 그녀의 극적인 감정 변화가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찾는 과정과 닮았다.
리지의 여정은 촬영 전 자료조사를 위해 왕가위 감독이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 프로덕션 디자이너 장숙평과 함께 미국 전역을 돌며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연을 접했던 촬영진은 이를 변용해 각각의 에피소드에 활용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멤피스의 어니와 수 린 커플, 죽음을 매개로 아버지와 화해하는 네바다의 레슬리 사연은 리지의 감정적 흐름을 또 다른 방식으로 대변토록 했다. 왕가위가 “이 영화는 로드무비가 아니다. 단지 ‘거리’(distance)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한 건 그래서다. 표면상 미국 횡단 여행처럼 보이지만, 아픔을 치유한 리지가 뉴욕에 남아 그녀를 기다리는 제레미와 결국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감정적 거리에 관한 영화라는 것.
형식의 새로움과 달리 왕가위 특유의 현란한 영상은 좋게 말하면 홍콩 시절 그대로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를 정도로 답습하는 인상이 강하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왕가위 영화치고 평범해 보이는 것은 이야기 형식에 적합한 영상언어를 보여주지 못한 까닭이다. 이미지의 관점에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는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의 그림자가 짙게 서려 있다. 기다림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군중 속의 고독을 포착하는 스텝 프린팅, 안타까운 심정을 손짓 혹은 발짓만으로 전달하는 대담한 표현방식까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 이미지의 종합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이 영화에는 캐릭터의 감정을 영상으로 치환한 이미지가 부재하다. 가령 복작거리는 홍콩은 특성상 스텝 프린팅이 적합한 것에 반해, 한적한 뉴욕의 카페 안에서 구현되는 스텝 프린팅은 맥락 없이 사용된다. 그저 인물의 감정과 따로 놀며 눈을 현혹하는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리지, 제레미, 어니, 수 린, 레슬리 등 등장인물들은 미국의 캐릭터일지 모르지만, 홍콩 시절의 필터를 통과한 이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적이고 이질감이 느껴진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가 미국적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적인 영화로 만드는 데는 실패한 작품이다.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Tip! 보이지 않는 손, 로렌스 블록<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찍기로 결심한 왕가위는 대본을 써줄 전문작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설가 로렌스 블록의 팬이었던 왕가위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38년 미국 버펄로에서 태어난 블록은 미국 추리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국내에는 <800만 가지 죽는 방법> <무덤으로 향하다>로 유명하다.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미키 스필레인 등 하드보일드 소설의 창조적인 계승자로 평가받는 그는 지금까지 4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그중 5편이 영화와 TV시리즈로 제작됐다.
왕가위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로렌스 블록의 소설을 여러 권 가지고 다녔고,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영감을 얻어 이야기를 구상하기도 했다. 특히 1973년 <성스러운 술집이 문을 닫을 때>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블록의 소설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된 매튜 스커더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매튜 스커더는 작가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투영한 사립탐정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복합적 캐릭터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등장하는 경찰관 어니는 바로 이 캐릭터를 모델로 했다.
사실 왕가위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4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착안, 장마다 다른 작가에게 대본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블록의 빠른 작업방식과 무엇보다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고. 결국 로렌스 블록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모든 이야기를 왕가위와 함께 작업했다.

FILM2.0 377호
(2008.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