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친구들] <마더> 흑백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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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다. 봉준호 감독이 2009년에 발표한 바로 그 <마더>말이다. 그런데 지금 왜? 흑백 버전이 발표됐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설국열차>를 촬영하던 중에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둠의 콘트라스트가 구현하고자 했던 빛의 느낌이 <마더>의 흑백 버전으로 더 잘 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새로운 장면이나 사운드 등의 추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흑백 전환만으로도 <마더>는 컬러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제공한다. “흑백이라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이 있다”고 소감을 밝힌 봉준호 감독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스산한 흑백의 느낌이 <마더>와 어울린다. 인물의 섬세한 연기도 더욱 부각되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생각도 다르지 않아서 “인물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마더>는 애초 기획 당시 고전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상대적으로 클래식한 아나모픽 렌즈로 촬영이 됐다. 극 중 엄마가 자식으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의 테마가 모든 엄마들이 경험했고 또 경험해야 하는, 요컨대 클래식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더>가 사건보다는 그에 맞춰 변화하는 엄마를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봉준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이번 흑백 버전에 대해 하나 같이 ‘인물’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다.

확실히 흑백 버전을 보고 있으면 인물과 배경 양쪽으로 시선이 분산되던 컬러 때와는 다르게 캐릭터, 특히 캐릭터의 ‘표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오프닝의 의도부터가 그렇다. 반듯한 엄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김혜자가 추레한 몰골로 광활한 갈대밭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막춤을 춘다.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춤 때문만은 아니다. 우는 것도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뭐라 형언하기 힘든 표정이 함축한 ‘엄마’라는 사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친근하면서도 성역에 속하는 존재다. 이는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는 저변의 의식에서 출발한다.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무성의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담겨 있는 것이다. <마더>에서 노골적으로 제시되는 성적인 코드는 바로 이에서 기인한다. “너 여자랑 자봤어?” “어” “누구?” “엄마” 진태(진구)와 도준(원빈)이 나누는 얄궂은 대화에서부터 한 이불 위에서 서로의 몸을 밀착하는 모자(母子)간의 잠자리, 진태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간 엄마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질펀한 섹스까지.

그중 어두운 약재상 안에서 좁고 기다란 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시각화한다. 이 장면의 구도는 여러 모로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은 여성의 성기를 정면에서 응시해 확대한 그림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 제목이 의미하듯 어떤 영원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세상의 근원>과 같은 나체 묘사 외에도 <돌 깨는 사람들> <루애의 동굴>과 같은 풍경화를 작업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쿠르베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어머니의 대지를 보았고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여성의 나체를 그렸다.  

같은 구도지만 봉준호 감독이 의도하는 바는 <세상의 근원>과는 좀 다르다. <마더>는 이 장면을 ‘비극의 근원’으로 접근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약재상의 성기 이미지는 영화 초반과 후반에 각각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것인데 초반부에는 바깥을 보며 작두질하던 엄마가 손을 베어 피를 흘림으로써 생리가 가능한 ‘여자’로 비춘다. 그에 반해 후반부에는 초반과 달리 안전하게 작두질에 성공함으로써 여자가 아닌 ‘엄마’가 됐음을 알린다. 엄마가 미친 이유를 밝히는 영화의 목적은 곧 엄마는 왜 섹스와 별개의 존재가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작동시키는 변곡점은 다름 아닌 아들 도준의 살인 사건이다. 사건 전까지 이들 모자 관계는 어쩌면 남녀관계일 수도 있을 만큼 모호해 보인다. 하지만 누명을 쓴 줄 알았던 도준이 실은 진범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엄마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오프닝에 제시됐던 엄마의 표정에 다시금 주목한다. 이제는 넋 나간 표정으로 구체화된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며 그 사연과 관련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가슴 찢어지는 자식의 진실을 마주한 지금, 당신이 엄마라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렇기에 <마더>는 진범 찾기보다는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한다.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남극일기>의 도달불능점처럼 모성의 최극단에 가보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도준이 진범임을 밝히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 지점에는 제 새끼의 죄악마저 눈감아 줄 수 있는 이기적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아들의 잘못을 덮어 가정의 행복을 이뤄보겠다고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이 땅 모든 엄마들의 운명, 즉 세상의 근원이라 할 만한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며 그 자리에 비극의 근원을 위치시킨다.

<세상의 근원>과 ‘비극의 근원’의 차이를 대입해 <마더>의 컬러와 흑백 버전의 차이를 설명해도 될 것 같다. 컬러일 때도 약재상의 성기 이미지는 어둡기 마찬가지였지만 흑백으로 전환된 이 장면은 더욱 비극적인 오라가 더해진다. 희망이라고는 스며들 수 없는 철저한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인 것이다. 이는 결국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함인데 다만 <마더>의 모성이 더욱 지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이를 희생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대상이 자신들보다 더한 약자라는 데 있다.  

봉준호 영화에서 약자는 늘 주인공이었다. 약자를 도와주지 않는 사회의 시스템과 사투를 벌였으며 그래서 약자끼리 연대했다. <마더> 역시 약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강자에 대항하기는커녕 약자와 약자끼리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확연히 차별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흑백으로 전환되면서 영화의 분위기가 더욱 스산해졌다”) 약한 자를 밟고, 더 약한 자의 지분을 빼앗아야만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엄마=괴물’이라는 등식은 전작 <괴물>(2006)에서 이미 등장했었다. 한강에 방류된 독극물처럼 한국에 존재하는 온갖 부조리를 씨앗삼아 태어난 괴물은 강두(송강호) 가족에게 부재한 엄마의 상징이었다. 단적인 예로, 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딸 현서(고아성)를 꺼내는 장면은 출산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강두는 현서를 잃는 대신 세주(이동호)를 얻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괴물>은 ‘가족의 탄생’이었던 셈이다. <마더>는 ‘가족의 유지’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엔딩의 관광버스 장면은 망각을 방패삼은 모성의 정체를 잘 보여준다. 막춤을 추는 일행에서 벗어나있던 도준의 엄마는 허벅지에 침을 놓음으로써 아들의 살인을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여자라는 자신의 성도 망각하고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세상으로부터 ‘우리’ 아들을 보호하는 것만이 그녀의 임무이자 의무가 됐다. 이는 곧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의 비극이요, 운명이다. 그래서 흑백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엄마가 침을 놓는 순간, 컬러로 전환된다. 그에 맞춰 도준의 엄마에게만 모아지던 관객의 시선은 흑백에서 컬러로 색이 분산되면서 막춤을 추고 있는 일반의 엄마들에게로 확장된다. 오프닝에서 혼자 춤추던 도준의 엄마는 엔딩에 이르러 관광버스 막춤을 추며 동네 엄마들과 한데 뒤섞이는 것. 확실히 <마더>의 흑백 버전은 새로운 분위기로 영화의 의도와 주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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