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는 자식의 허물을 눈감아야 하는 한국 어머니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다. 엄마 혜자(김혜자)는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도준(원빈)이 동네 여고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누명을 벗기겠다며 스스로 사건 추적에 나선다. 하지만 아들이 진범임을 가리키는 사실 앞에서 이를 평생 비밀에 붙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사회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제 새끼의 죄악마저도 눈감아 줄 수 있는 이기적 모성의 학습을 뜻한다.
모성의 본질을 다루는 까닭에 <마더>에는 엄마를 섹스와 별개의 존재로 바라보는 한국인 특유의 시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극단적인 모성의 정체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는 저변의 의식을 결합하는 이 영화의 핵심 정서는 ‘은밀함’이다. <마더>에서 여자의 특정 신체를 연상시키는 미장센이 은근히 제시되는 이유다. 그중 어두운 약재상 안에서 좁고 기다란 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혜자의 시선은 명백히 여성의 성기를 시각화하는데 극 중 수미쌍관을 이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첫 장면에선 바깥을 보며 작두질하던 혜자가 손을 베어 피를 흘림으로써 생리가 가능한 ‘여자’로 비추는 것에 반해 마지막엔 안전하게 작두질에 성공함으로써 ‘엄마’가 됐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장면의 구도는 여러 모에서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1866)을 연상시킨다. <세상의 근원>은 여성의 성기를 정면에서 응시해 확대한 그림으로 악명이 높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풍만한 가슴과 복부도 노골적이지만 무성한 음모 속에 모습을 드러낸 성기는 지금의 시선으로도 충격적일 만큼 혁신적이다. 특히 이 작품이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그림들과 전적으로 차별되는 이유는 어떠한 수식 없이 사실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근원>을 작업할 당시 쿠르베는 한창 유행이던 나체 사진에 푹 빠져있기도 했거니와 원래부터 사실적인 묘사로 명성을 쌓아오던 터였다. 다만 이 그림이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제목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서는 어떤 영원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세상의 근원> 외에도 <잠>(1866) <파도의 여인>(1868) 등 나체를 대상으로 한 그림을 그리는 한편으로 <돌 깨는 사람들>(1849) <루에의 동굴>(1864)과 같은 풍경화를 작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대상을 다루는 <세상의 근원>과 <루에의 동굴>이 실은 같은 그림이라고 한다면 믿어지시는가.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검은 동굴 한 가운데로 물이 흘러나오는 <루에의 동굴>의 구도가 그대로 <세상의 근원>에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쿠르베가 자연을 묘사하듯 여성의 성기를 그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819년 프랑스 오르낭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는 어릴 적부터 풍경을 관찰하는데 익숙한 삶을 지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드넓은 대지, 씨를 품은 대지 위로 무성하게 피어오른 새싹과 나무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삼아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의 작품에서 유독 물이 흐르는 광경이 많은 이유는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몸의 순환을 돕는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쿠르베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어머니의 대지를 보았을 테고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여성의 나체를 그렸을 것이다.
<마더>의 약재상 장면이 의도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뭇한 음모와 같은 약재들 사이에서 위치한 세로 문, 즉 상징적인 성기 이미지 바깥에는 모성의 산물인 아들 도준이 자리하고 있다. 대지 위에 싹을 피워 열매를 맺기까지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듯 엄마의 의무 역시 자식을 돌보아 성장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은 쿠르베의 순수한 시선이 느껴지는 <세상의 근원>과 달리 <마더>의 봉준호 감독은 약재상의 성기 이미지를 통해 갈수록 각박해지는 한국사회를 비극적으로 바라본다. 아들의 잘못을 덮어 가정의 행복을 이뤄보겠다고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이 땅 모든 엄마들의 운명, 즉 세상의 근원이라 할 만한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며 그 자리에 비극의 근원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우리가 밝히기를 꺼릴 뿐이지 경험으로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인정할 뿐인데 이는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지만 원래는 1866년 당시 파리 주재 터키 대사이자 대부호였던 칼릴 베이가 쿠르베에게 주문한 제작품이었다. 애초 개인적인 용도로 제작된 그림이지 공개를 목적으로 한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의 근원>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완성된 지 무려 122년 뒤인 1985년이었다.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쿠르베 회고전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1995년 6월 26일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등재됐다.
그동안 <세상의 근원>이 개인의 소장품으로 꼭꼭 숨겨져 있었던 이유는 은밀하게 감상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쿠르베가 외설용으로 그린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림을 대놓고 본다는 것은 사회적인 금기에 속했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보기 민망한 그림을 공개적으로 감상한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이 그림은 완성되었을 때부터 어떻게 가려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1955년 파리의 한 경매장에서 <세상의 근원>을 구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숑에게 그림 속 성기를 가리겠다며 덮개 그림을 의뢰한 일화는,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마더>의 혜자가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도준의 범죄를 오랫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던 <세상의 근원>의 뒷이야기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금기의 바탕에는 언제나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미의 공포가 <마더>의 기저에 흐른다면 <세상의 근원>에는 공개됐을 경우 사회적으로 불러일으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 그림 외적으로 아우라를 형성한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목격되는 공포의 정체는 모두 성적인 영역에 걸쳐 있다. 말하자면,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작용한 결과다.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여자로 바라보는 <마더>의 시선, 매일 같이 보는 신체 일부지만 공개를 꺼리는 <세상의 근원>의 시선, 두 작품은 모두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은밀한 경계 위에서 대중의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영화 < 밤과 낮> 포스터에서 김영호 씨가 보던 그 그림이로군요!
맞아요, 김영호의 오른쪽 팔뚝의 힘줄들이 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포스터였더랬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