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렛>(Les reg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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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 칸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의 인물들을 심하게 내몰기로 유명하다. 어느 철학자가 17세 소녀를 만나 그녀의 육체를 탐닉하다 맞이하는 죽음을(<권태>(1998)), 연쇄살인마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탐구하는 악마와 순수의 이중성을(<로베르토 수코>(2000)), 알코올 중독자이자 신경증 환자인 중년 남자가 참극을 겪으면서 깨닫는 회한을(<레드 라이트>(2004))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인물들을 극단으로 다그쳐 도덕이나 윤리 같은 개념을 휘발시키면 종국에 침전물처럼 남는 감정이 생긴다. 세드릭 칸은 이야말로 본디 인간이 가진 진짜 감정이라고 믿는 감독이다.

<리그렛>에서 그가 주목하는 인간 본성은 제목 그대로 ‘후회’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에 내려온 매튜(이반 아탈)는 길가에서 우연히 옛 연인 마야(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와 마주친다. 서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채 헤어지지만 마야는 남편이 부재한 틈을 타 매튜를 집안에 들이고 급기야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각자의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 만나는 횟수는 늘어만 가고 결국 이들은 단 둘만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하지만 결정의 순간, 마야는 결심이 흔들리고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그녀를 보면서 매튜는 이성을 잃고야 만다.

<리그렛>은 거칠게 비교하자면 프랑스 버전의 <건축학개론>을 연상시킨다. 한때 사랑했지만 안타깝게 헤어졌던 주인공 남녀가 15년 만에 만난다는 점, 그 와중에 남자의 직업이 건축가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유사성이 영화 초반에 부각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설정의 유사성은 일부 발견되지만 이를 전개하는 방식은 극과 극으로 완전히 갈라진다. <건축학개론>이 두 남녀의 과거의 기억을 적극 끌어와 플라토닉한 선에서 순수를 회복하는 것에 반해 <리그렛>은 이루지지 못했던 과거의 사랑에 대한 아쉬움을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에로스를 통해 과감한 일탈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튜와 마야의 일탈은 낭만, 순수 같은 백색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미련을 남긴 채 헤어졌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틈만 나면 성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들에게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향해 무모하게 날아드는 불나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과연, 그것이 애욕인지, 성욕인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매튜의 가정은 파탄을 맞게 되고 불안하게 가정을 유지하던 마야 역시 끝내는 홀로 남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결과가 뻔한 게임인지 알면서도 본능을 억제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매튜와 마야에게서 제삼자인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어리석음일 테지만 이들에게도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매튜와 마야가 내세우는 이들 관계의 정당성은 다름 아닌 ‘후회 없는 사랑’에 있다. 각각 지금의 부인, 남편과 애정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매튜와 마야에게 15년 만에 찾아온 옛사랑은 마음속 시커멓게 심지만 남은 감정의 도화선에 격하게 불을 일으킬 만하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 체면과 지위 같은 게 무슨 의미를 가질까. 게다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세드릭 칸 감독만큼은 인간사 이성으로 풀 수 없는 본성과 감정의 미스터리가 있다는 것을 <리그렛>에서 다시 한 번 입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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