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Love, Free or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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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로빈슨은 최초의 게이 주교다. 더 정확히는 기독교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최초의 주교다. 맥키 알스톤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로빈슨 주교의 두 가지 사랑>(이하 ‘<로빈슨 주교>’)은 로빈슨 주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힌 이후 보수적인 기독교도들에 맞서 동성애를 인정해줄 것을 부드럽지만 강하게 맞서는 과정에 집중한다.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Love, Free or Die’다. ‘사랑을 선택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정도인데 꽤 공격적인 제목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빈슨 주교는 커밍아웃을 한 이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거의 매일 같이 사탄 취급을 받았다. 더욱이 2003년 정식으로 미국 뉴헴프셔주(州)의 주교로 서품되자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방탄조끼를 입고 다녔을 정도다.

뭐, 어느 정도 예상한 가능한 시나리오다. 동성애에 대해 가장 격렬한 반대 의사를 밝힌 쪽은 언제나 기독교의 보수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커밍아웃을 한 로빈슨 주교에게 있어 사랑은 자의든, 타의든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죽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동성애는 사랑하는 대상이 이성애와 다를 뿐이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상은 만인에게 열려있는 게 아닌가.

이에 대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보수적인 세력은 로빈슨 주교의 커밍아웃으로 인해 기독교가 분열되었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보수적인 세력의 표현에 의하면) 분열의 형태는 기독교를 이간질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아니다. 오히려 2000여 년 전에 쓰인 성경에만 경도되어 변화하지 않으려는 보수와 성경도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는 진보의 충돌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그래서 분열이 아니라 결국 과거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발전적인 미래로 향해 나아가느냐, 갈림길에 선 기독교의 현재라고 할 만하다.

이 지점이야말로 <로빈슨 주교>가 동성애를 향한 편견의 벽이 얼마나 높인지 확인하는 선에서 끝을 맺는 여느 동성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와는 차별되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로빈슨 주교 개인의 편견 맞서기에만 카메라를 가져가는 대신 이를 통한 기독교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에도 주목한다. 맥키 알스톤 감독이 <로빈슨 주교>의 결말의 배경으로 미국 성공회 총회를 가져간 것은 이 때문이다.

성공회는 기독교 종파 중 가장 큰 세력에 속한다. 성공회의 수장은 로완 윌리엄스 대주교로, 10년마다 성공회의 탄생지인 영국 캔터베리에서 열리는 주교 총회 ‘램버스 회의’에 로빈슨 주교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는 교회 내 동성애자인 로빈슨 주교와 그가 사랑하는 배우자의 결혼, 즉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이 장면이 <로빈슨 주교>의 오프닝에 배치되지만 결말에 이르면 우리는 기독교의 동성애를 향한 조금은 변화한 태도를 목격할 수 있다.

동성애자와 동성결혼에 대한 안건이 대희원회에 상정된 미국 성공회 총회에서 가결된 것. 반대표를 던진 이들은 여전히 이 안건이 기독교의 분열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라며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바로 눈앞에 닥친 변화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진 로빈슨 주교다.

로빈슨 주교는 어느 토크쇼에서 체스 판의 ‘비숍 bishop'(이를 번역하면 ‘주교’다!)을 빗댄 질문을 받는다. “비숍은 대각선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이에 대한 로빈슨 주교의 대답. “저는 기독교 내에서 비숍이지만 사실은 퀸이랍니다. 그래서 어디든 움직일 수 있어요.”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행동의 제약이 아니라 자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재치 있게 답변하는 로빈슨 주교의 모습에서 우리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다. 사랑은 죽음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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