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캅> 정물로 전락한 미국인의 슬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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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2014)은 공식적으로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한 <로보캅>(1987)의 리메이크이다. 다만 기본적인 설정은 취하되 원작에서 좀 더 나아간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능한 경찰이었던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가 범인 검거 중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고 로보캅이 되는 과정은 두 영화 모두 별반 차이가 없다. 날로 범죄가 증가하는 디트로이트의 범죄율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경찰력이 필요한데 로봇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기업의 이해와 맞아 떨어져 로보캅이 탄생하는 것이다.

근데 폴 버호벤 버전과 다르게 호세 파딜라 감독은 그 과정에서 로보캅을 잘근잘근 해체하는 수준으로 머피의 몸이 어떻게 로봇 수트와 연결되었는지를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인가, 기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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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부상 이후 의식을 회복한 머피는 자신이 로봇 수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데넷 노튼(게리 올드만) 박사에게 원래의 몸으로 돌려놓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노튼 박사는 로보캅 수트의 팔, 다리, 몸통 부분을 차례로 분리하니, 남아있는 머피의 실제 육체라는 것은 머리로부터 이어진 기관지와 심장을 감싼 두 개의 폐, 그리고 오른손이 전부다. 이에 머피는 비명을 지르며 좌절하고 마는데 이 광경은 인간의 신체를 정육점의 고깃덩이에 비유해 일련의 작품 활동을 펼쳤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의 습작>(1953)나 삼단 제단화인 <십자가책형>(1965)에서 보듯 프랜시스 베이컨은 기괴하게 표정이 일그러진 인물이 비명을 지르는 광경이나 가축의 몸처럼 도축 당한 듯 훼손된 인간의 육체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림이지만 그것이 주는 인상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을 일러 ‘공포의 화가’라고 명명했을 정도다. 머피의 육체와 로보캅 수트를 분리하는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 역시 공포다. 호세 파딜라 감독은 그 자신을 프랜시스 베이컨에 빙의해 이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하는 작품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극 중 로봇 테크놀로지 기술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 옴니코프 사의 CEO 레이몬드 셀라스(마이클 키튼)의 사무실에는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그림 세 점이 나란히 걸려있다. 이 작품 들 속에는 감옥과 같은 공간 안에 매달려 있는 훼손된 인간의 육체가 그려져 있다. 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인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고 그린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 Triptych Inspired by Oresteia of Aeschylus>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트립틱 triptych’이라 불리는 삼단 제단화 양식을 즐겨 활용해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1969)다. (루치안 프로이트는 베이컨의 동료 화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손자이기도 하다.)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그의 말년인 1981년에 만들어진 까닭인지 가장 안 알려진 축에 속한다. 꼭 말년에 만들어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듯 그의 작품은 소재의 잔혹함은 물론 빨강과 같은 원색을 사용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전체적으로는 베이지 톤이 우세해서 예전만한 압도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베이컨의 그림이 인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호세 파딜라 감독이 왜 베이컨의 그림을 등장시켰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로보캅 수트에 들어간 머피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로봇이라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머피의 처지는 도축당해 갈고리에 매달린 고깃덩이와 무엇이 다를까, 에 대한 정체성 혼돈에 대한 문제 제기다. 다만 그리 새로울 게 없는 것은 1987년 버전에서 폴 버호벤 역시 똑같은 접근법을 보여줬던 까닭이다. 범인을 검거하기로 프로그래밍 된 머피(피터 웰러)가 가족을 만나면서 회복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 자체로 폴 버호벤의 주제의식이었다. 중요한 건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와 같은 삼단 제단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림이 배치된 그 방의 구도다.  

혹은 상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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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스의 사무실은 CEO의 위상을 말해주듯 굉장히 넓다. 한편으로 뭐 그리 넓을까 싶지만 이 사무실은 그림이 눈에 잘 띄는 구조로 설계되었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셀라스의 책상 뒤편에 걸려있는데 카메라는 그와 같은 구도로 여러 차례 화면을 잡는다. 말하자면 그림을 잘 보이도록 배치한 사무실과 카메라의 구도는 어떤 면에서 그림을 판매하는 경매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다. 셀라스의 사무실은 경매장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방의 구도가 짜여졌다. 더 자세히는 뉴욕에 자리한 크리스티 경매장을 실제 모델로 했다.

2013년 11월 14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사상 최고 경매가의 미술 작품이 나왔다. 바로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이었다. 그 전까지는 소더비 경매에서 에드바르트 뭉크의 대표작 <절규>(1895)가 기록한 1억190만 달러가 가장 높았는데 베이컨의 작품은 이보다 2000만 달러를 더 상회하며 1억 4240만 달러(한화 약 1528억 원)로 판매됐다. 이 소식은 그 날로 세계 곳곳에 타전되어 화제의 뉴스가 되었다. 그만큼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걸작이라는 사실을 인증한 것. 다만 천문학적인 액수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가격 흥정은 대중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로보캅이 된 머피의 정체성 혼란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구입할 수 있는 그림은 예술인가? 상품인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만약 옴니코프 사를 운영하는 셀라스 같은 이라면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놓은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단언컨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었을 것이다. 폴 버호벤 버전에서 옴니코프 사의 CEO의 이름은 딕 존스였다. 호세 파딜라 감독이 알렉스 머피와 그의 경찰 동료 루이스(원작과 다르게 리메이크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 캐릭터로 바뀌었다!)와 같은 주요 인물의 이름은 놔둔 채 옴니코프 사 CEO의 이름을 바꾼 건 로보캅을 인간도, 기계도 아닌 상품으로 바라보는 셀러스의 시선을 반영한 것일 테다.

셀라스라는 이름은 당연히 상품 판매인, 즉 ‘셀러 seller’를 생각나게 한다. 셀라스가 옴니코프 사가 보유한 로봇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로보캅 상용화에 열을 올리는 건 이를 통해 주식의 가치를 끌어올린 후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남편을 잃기 싫은 부인의 마음을 헤아려 순수한 마음으로 머피를 되살리는 노튼 박사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그리고 셀라스의 입장은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켜 실은 군수산업의 이득을 꾀하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머피는, 아니 로보캅은 경매 시장의 그림처럼 최고가를 칠 때 팔아넘길 수 있는 상품 그 자체다.  

결국, 정물이다

그러니 셀라스에게 머피가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이란 단순히 상품의 하자일 뿐이다. 셀라스는 하루빨리 대중 앞에 로보캅이라는 상품을 선보여 언론에 노출시킨 후 주가를 높일 계획을 갖고 있다. 이에 노튼으로 하여금 머피가 단 한 톨의 감정도 느끼지 않게끔 손을 볼 것을 강제한다. 그와 맞물려 셀라스의 사무실에 걸려 있던 그림 속 소재 역시 붉은 살코기와 같은 신체에서 정물로 바뀐다. 가운데 그림에는 로보캅 수트의 재질인 듯한 합금 조각이 구겨진 채, 바깥쪽 두 점의 작품에는 아그리파를 떠올리게 하는 두상이 시커멓게 칠해진 채 제시되는 것이다.

이는 로보캅을 둘러싼 논쟁의 시선이 하나로 모아졌음을 시사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짓눌린 듯 인간의 초상을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지만 공포라는 감정으로 이를 감각하게 만든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감각이 들어서니 베이컨의 그림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인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또 논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베이컨의 그림에서 곧잘 활용되는 갈고리에 걸린 신체 이미지는 어떤 면에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예수의 형상과 겹쳐지고는 한다. 베이컨은 이런 의도를 반영하고자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와 같은 삼단 제단화 양식을 애용하고는 했다. 로보캅도 마찬가지다. 삼단 제단화 속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이 혈액을 공급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로보캅은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제단을 연상시키는 기계틀에 자신의 몸을 고정해 둔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머피의 처지가 측은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셀라스 사무실의 바뀐 그림의 정물에는 이성이나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냥 차갑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를 가진 ‘바니타스 Vanitas’의 전형적인 정물화에 다름 아니다. 전투로봇을 상용화하겠다며 셀라스에게 감정을 거세당한 머피는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볼 수없는 한낱 정물일 뿐이다. 무수한 전쟁을 일으켜 국가의 위상과 이득을 높이려는 미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군인의 덕목이란 이와 같을 것이다. 정부의 명령에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고 적으로 규정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살상무기로써, 상품으로써의 군인이라는 정물.  

그리하여, 정물의 시대

호세 파딜라의 견해는 폴 버호벤의 버전을 확장한 경우다. 폴 버호벤은 1987년 버전에서 다국적 기업이 범죄와 결탁하면 발생하게 될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슈퍼 파워만을 앞세운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행정을 비판했다. 그리고 호세 파딜라는 폴 버호벤의 예견이 이미 현실이 됐음을 인정하고 리메이크를 전개한다. 원작 영화에서 옴니코프 사를 경호하던 공격형 킬링머신 ‘ED-209’가 보병 타입의 로봇 ‘EM-208’과 함께 이라크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 중인 극 중 뉴스릴을 영화의 오프닝에서 노출하는 것이다. 2014년 버전이 단순한 리메이크라기보다 폴 버호벤 버전의 후일담이라는 성격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시급한 건 국내 범죄를 막겠다며 도입한 첨단의 경찰력을 9.11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해외로 범위를 넓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이다. 거기서 희생되는 건 알렉스 머피의 경우에서 보듯 인간과 인간이라는 가치다. 다행히도 영화는 정부와 언론의 비호를 받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선 알렉스 머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가치에 손을 들어준다. (흥미롭게도 극 중 인간 본위의 법을 발휘해 승리를 따내는 의원의 이름은 ‘드레퓌스’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이 영화를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편에 서서 로보캅의 상용화를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보수 언론인 팻 노박(사무엘 L. 잭슨)의 마지막 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중단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미국은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남을 거야.” 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은 정물의 시대에 인간으로 인정받기 힘든 미국인을 모델로 한 현대인의 슬픈 초상이다.

맥스무비
(201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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