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영화로 써내려간 삶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해 2월에 열렸던 60회 베를린영화제의 화제작은 단연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 작가>(2010)이었다. 영화가 훌륭해서? 그런 배경도 있지만 폴란스키 감독이 스위스에서 수감된 상태라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가 더 크다. 1977년 미국에서 13살의 미성년자 소녀와 성관계를 맺은 혐의였다. 불구속상태에서 프랑스로 도피한 후 30년 넘게 유럽 망명 생활을 지내다 2009년 9월 취리히영화제 공로상 수상을 위해 스위스에 입국 도중 긴급 체포된 것.

감독상에 호명되었음에도 불구, 프로듀서가 대리수상하자 호사가들은 극중 섬에 갇힌 주인공 대필 작가와 폴란스키의 처지가 닮았다며 연일 입방아를 찧어댔다. 물론 유명 인사의 사생활을 소재 삼은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존경받는 감독과 난봉꾼 사이에서 폴란스키가 보여준 인간성의 극단은 그가 탐구해온 영화적 세계와 닮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극단적인 감정에 주목하다

데뷔작 <물속의 칼>(1962)부터 <유령 작가>까지, 로만 폴란스키는 소재불문, 장르불문하고 수작을 양산해왔다. “그 어떤 것보다 나는 이야기의 힘에 매혹된다. 이야기만이 나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인다.”는 그의 말처럼 폴란스키의 영화는 특정한 분류로 귀속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연약한 감정의 틈 속에 똬리 튼 강박증의 사연에 관심을 집중하며 필모그래프를 쌓아왔다.

폴란드인의 부정적인 삶을 소재 삼았다는 이유로 의회로부터 고발 조치 당했던 <물속의 칼>에서는 중년의 남편과 아내 사이에 끼어든 젊은 남자를 통해 부부 관계의 허약함을 드러냈고, 고국 폴란드를 탈출해 영국에서 찍은 <혐오>(1965)에서는 반복된 삶과 외로움으로 무너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에 주목했다. 할리우드로 옮겨 작업한 <악마의 씨>(1968)에서도 폴란스키는 우리 이웃과 가족에까지 침투한 광신을 통해 당대 미국인의 불안 심리를 우회적으로 묘사했다.

인간 감정의 깊은 우물 속을 헤엄쳐 문제작을 건져내는 연출의 특징은 그의 작품에 대한 수사학적 비유가 아니다. 폴란스키는 그 속을 헤아리기 힘든 물의 이미지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 즐겨 사용했다. 이미 제목에서 언급되듯 <물속의 칼>은 겉으론 별 문제없는 부부 사이에 내재한 불안을 암시하고, <차이나타운>(1974)은 물 부족을 겪는 LA의 추악한 수로 산업을 통해 허황된 욕망을 폭로하며, 망망대해의 유람선이 배경인 <비터문>(1992)은 탈출구 없는 부부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을 통해 비극적 말로를 보여준다.

안 그래도 그가 추구하는 영화의 개념은 회화에 가깝다. “영화는 그림이나 조각과 같다. 영화는 바라보는 것이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곧잘 ‘아파트 삼부작’으로 소개되는 <혐오><악마의 씨><테넌트>(1976)가 좁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것도 그런 폴란스키의 영화적 성향을 반영한다. 아파트처럼 일상적인 공간을 환각의 지옥도로 그려내기 위해 그가 추구한 표현주의적 면모, 예컨대 복도를 뚫고 나오는 수많은 손(<혐오>)이나 창문 밖으로 유령처럼 스윽 훑고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테넌트>) 등은 화가의 손길을 연상시킬 만큼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박쥐성의 무도회>(1967)는 폴란스키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이질적이지만 파격이란 측면에서 그의 관심사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경우다. 저예산 B급 영화의 정취를 고스란히 장식한 <박쥐성의 무도회>는 기존 흡혈귀 영화에 사드-마조히즘, 관음증, 동성애를 끌어들여 상식과 도덕을 의도적으로 교란한다. 전작까지 회화적인 면모를 거쳐 드러나던 극단적 감정의 실체가 이 시기에 이르러 더욱 대담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후에 나올 <맥베드>(1971)의 피에 굶주린 맥베스나 <차이나타운>의 근친상간 등 파격의 소재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인을 넘어 거대 악을 쫓다

인간의 악마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폴란스키의 영화를 두고 혹자는 그의 비극적인 삶을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삶은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8살 때 독일의 유대인 집단수용소에 억류되어 어머니를 잃었다. 1969년에는 <박쥐성의 무도회>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배우 출신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임신한 상태로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후 찍은 <맥베드>가 셰익스피어의 피의 버전이 된 연유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개연성 없는 분석은 아니지만 로만 폴란스키에게 삶은 거대 악에 맞선 투쟁이자 싸움이었다. “친구들이 서구에서 사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할 때 나는 가능한 빨리 폴란드를 탈출하고 싶었다.”는 그가 극단적 감정의 세계를 넘어 거대 악의 탐구로 관심을 서서히 옮겨간 것은 자연스럽다. <악마의 씨>에서 악마의 자식을 낳은 로즈마리(미아 패로우)가 엄마의 본능으로 아이를 품는 장면은 폴란스키의 악에 대한 견해를 잘 보여준다. 일개 개인의 악마성이 ‘씨’가 되어 세상에 폭력과 악을 퍼뜨린다는 것.

그런 점에서 <차이나타운>과 <피아니스트>(2002), <유령 작가>는 ‘거대 악 삼부작’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성 싶다. 무려 36년의 세월 동안 이뤄진 작품들이라 미묘한 태도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차이나타운>이 거대 악 앞에서 허무하게 무릎 끓는 개인을 보여준다면 <피아니스트>는 세계2차 대전의 죽음을 뛰어넘은 피아니스트의 삶을 응시한다. 그리고 <유령 작가>는 폴란스키의 개인적인 경험을 투영한 <피아니스트>와 달리 순수하게 현존하는 사회악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간다.

<유령 작가>는 영국 전 총리 애덤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대필 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전임 대필 작가의 의문의 죽음을 쫓는 과정을 그린다. 극중 애덤 랭은 고문당할 것을 알면서도 테러 혐의자를 미국 CIA에 넘긴 혐의로 국제인권재판소에 고소당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폴란스키가 주목하는 현시대의 악의 존재는 어렵지 않게 추측가능하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전히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폴란스키의 시선이다. <피아니스트>에서 인간의 삶을 긍정하던 그의 견해는 <유령 작가>에 이르러 다시 부정으로 원상 복귀(?)했다. 이를 가지고 스위스에 갇힌 폴란스키의 심정을 읽어내는 건 얄팍한 처사다. 그의 삶은 늘 세상의 날카로운 날 위에서 줄타기를 했고 베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영화를 놓지 않았다. 비록 그 상처는 아물 것 같지 않지만 삶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적 탐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Tip!  배우 로만 폴란스키를 아시나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로만 폴란스키는 연출에 앞서 19살 때인 1954년 안제이 바이다의 <제너레이션>을 통해 공식적인 연기 데뷔를 갖았다. 폴란드영화학교 재학 시절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연기를 병행했다. 행위를 통해 표현한다는 점에서 연기에 재미를 느낀 폴란스키는 서방 세계로 넘어간 이후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펼쳤다. 자신의 연출작인 <박쥐성의 무도회>와 <테넌트>에서는 주인공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특히 악당으로 출연해 주인공 잭 니콜슨의 코를 베는 <차이나타운>에서의 연기는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30편이 넘는 작품에서 주연과 카메오를 넘나들며 화려한 연기 경력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4명의 배우, 루스 고든(<악마의 씨>)과 잭 니콜슨, 페이 더너웨이(이상 <차이나타운>), 그리고 애드리언 브로디(<피아니스트>)를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올렸고 그중 고든(여우조연)과 브로디(남우주연)는 수상의 영예까지 안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beyond
2010년 6월호

10 thoughts on “로만 폴란스키, 영화로 써내려간 삶”

  1. 로만 폴란스키 식으로 따지자면, 동정조차 가지 않는 사람이네요.
    인과응보.

    난 사실 우디앨런이나 기타 다른 감독과 배우들처럼 예술 지상주의자였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미국의 청교도적인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로만 폴란스키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 초기엔 미국의 처사가 너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의 과거를 알면 알 수록 미국의 처사도 관대할 정도라 생각되더군요.

    우리 나라 같으면 아예 영화판에 발도 못 디뎠을텐데 그나마 미국이니까 외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거고..가 아니라,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것일테죠.

    같은 짓을 재능없는 사람이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유치한 역발상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과거의 행적과 그의 사고방식을 돌이키면 돌이킬 수록 하는 짓이 인과 응보란 생각입니다.

    세상을 악으로만 보고, 악에 저항한답시고 보이지 않는 악을 ‘만들어서’ 쑈-.-하시니…
    없는 악도 붙는 것일테죠.

    불교나 샤머니즘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라고 생각합니다…

    1. 님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만약 예술가의 능력이 죄를 사하는 근거가 된다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죄를 져도 상관없다는 논리가 되겠죠. 전 놀랐던 게 폴란스키가 체포됐을 때 엄청 많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감독, 배우들이 폴란스키의 체포에 항의했던 점입니다. 다만 제가 첫 문장에 ‘어느 정도’라는 말을 붙인 건, 그래도 전 여전히 폴란스키의 영화가 좋다는 점입니다. ^^; 심지어는 이번 영화 < 유령 작가>도 좋더라고요. 그래서 폴란스키에 대한 저의 견해는 혼란스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2. 헉…혹시 제 말투가 좀 과격했습니까?
    직접 만나서 말한다면 저렇지 않는데… 인터넷하다보면 말투를 부드럽게 쓰면 이상한 일을 겪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겨서..^^;;

    전 극단적으로 그를 어떻게 하자는 건 아니구요…^^
    다만..그런 생각은 들었습니다. 전 한때는 김동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예술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피아니스트 이야기에 공감을 느낄만큼 예술지상주의에 동감했었고 예술을 위해선 일상이나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내가 격은 사건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저 역시 로만 폴란스키의 체포에 항의한 예술가들처럼 똑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생명이든, 타인의 목적을 위한 도구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내용을 보면, 그 소녀야 말로 그녀를 배우로 만들고 싶어하는 소녀 어머니와 색골(표현이 과격하다면 양해를..) 로만 폴란스키 사이의 희생양입니다. 처벌을 받는다면 그녀의 어머니도 받아야겠지요…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재능있는 자의 범죄에 가까운 사생활에 침묵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거듭 화제가 되는 것이기도 할거라는 생각도 들구요. ^^

    어쨌든 제가 말을 과격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__)

    *
    그러나, 제 생각에는 굳이 소녀가 폴란스키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처벌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소녀 추행 사건의 개요를 보면 일단 소녀의 엄마가 사적인 야망으로 벌여놓은 일에 대해 예술가의 도덕성을 문제삼아 정부가 개입한다는 것은 상당히 웃기는 일이구요…. ^^;;
    도덕성은 애저녁 찾기 힘든 감독인데 문젠 그것이 법에 위반되는 행위라는 것일테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뜻이겠지요

    1. 오~ 아닙니다. 전혀 과격하지 않으세요. 혹시 제 답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나요? 아닌데… 이렇게 장문의 글을 남겨주시니 제가 오히려 미안해집니다. ^^; 전 피해자 소녀의 어머니가 사적인 야망이 있었다는 건 몰랐어요.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근데 폴란스키 문제는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보이네요. 아직도 스위스에 수감 상태로 있고 스위스 정부도 입장이 애매한 처지라서 미국의 수감자 인도에 변변한 답변도 못하고 있고 또 넘기자니 비난을 받는 것 같아 스탠스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과격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3. 여기http://blog.naver.com/sksdltkd/60071755370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는 글이 있는 것 같아서 그 곳 블로그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링크 올립니다.. < http://blog.naver.com/sksdltkd/60071755370 >

    소녀의 어머니의 야망은 저도 인터넷 블로그 상에서 읽은 거라 그게 팩트인지까지는 확인 하지 못했습니다.(인터넷 블로그들이 대부분 명확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확실하다는 듯이 말한 것에 대해서는 정정해야 할 것 같아 보는 이들이 넘넘 지겨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창피해 죽겠음에도 불구하고 덧글 답니다(저 갠적으로 남의 시선에 죽고, 시선에 살아서.;; 여튼.)

    위에 링크 된 글의 내용이 남웅님과 제가 언급한 폴란스키의 성추행 사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찾아보니 이 외에도 다른 소녀의 성폭행사건도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일단 넘어가고..

    그냥.
    폴란스키는 애초 성적인 문제에서는 어른스럽지 않은 건 사실인 듯 합니다. 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어차피 남들보다 좀 더 다른 취향이라면 자기랑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면되는데… 이 사람이 피해를 준 사람을 보면 (아무리 로리타 취향이라지만) 미아 패로나 잘나가는 여배우들도 아니고, 꼭 순진한 사람들이거나 약자거든요.

    잠깐 다른 얘기로..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프랑스적’인 소설가 프랑소와즈 사강.
    마약 투여 혐으로 법정에 섰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선언(!)했다고 하는 프랑소와즈 사강.
    사강의 그 말 처럼.
    프랑스 인들의 정신이란 그런 것 아니었을까요?

    프랑스인들은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피해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민족입니다.
    어떻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상처를 잊으려 하는 로만 폴란스키에 대해 프랑스인들과 예술인들은 이렇게 관대할 수가 있었을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니,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이 무색해졌습니다.

    어쩌면, 폴란스키는 예술가를 빙자한 사기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에 링크 시킨 네이버 블로거의 글을 읽어보니…

    글쓴이의 말처럼, 어쩌면 폴란스키는 미국의 비윤리적 언론과 법조계가 낳은, 또 한명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인들의 혹독한 처사-성추행사건을 거듭 화제삼아 도마에 올려놓는 것도 부족해, 피해 소녀의 신상까지 전부 까발기며 도덕성 없는 폴란스키를 자기들 맘껏 희롱하고 조롱해대는 미국의 ‘잔인한’ 언론과 법조계-
    .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프랑스인들이 옹호하는 것은 아마도. 예술 혼이나 로만 폴란스키가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는, 폴란스키 재능있는 줄도 모르겠어요.. 아니. 제가 영화를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그러한 처사에 대한 반발, 아니었을까…싶습니다.

    …..
    음………

    물론, 제 생각입니다.
    숫한 예술가와 인간의 도덕성과 타인의 사생활을 누구보다 더 중요시하는 프랑스인들이 비호하는 것, 아니 반발하는 것은, 로만 폴란스키가 아닌.
    도덕성 없는 미국인들이 (마치 주홍글씨처럼), 도덕성 없는 한 개인을 죽이는 미국의 비도덕성에 대한 반발.

    어쩌면, 프랑스에서 꼬집고 싶었던 것은 그 점, 아니었을까요?!
    폴란스키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폴란스키가 불행한 과거를 살았고, 어떤 영화를 만들었고,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
    폴란스키라는 한 개인에 대해, 미국 전역이 가하는 폭력적인 형태.

    그렇다면, 내가 생각해왔던 프랑스인들의 (미국의 비윤리적인 언론과 법조계에 대한 비판을 대놓고 공격하지는 못하지만)진정한 똘레랑스 정신,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예술을 들먹이니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이 우스워졌던 것이고.. 사실은 미국에 대한 비꼼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어쨌든, 두서없이 긴 말을 했는데…덧글 적다보니 솔직히 처음엔 동정할 가치도 없다,라고 내가 마치 심판자이고 판사인 듯이 말했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4. [프랑스를 동경하고 미테랑을 낭만적인 대통령이라 생각한 제 신념에 다시 자신감이 생기니 오히려 감사해집니다^^]

    그리고…무엇보다.

    결국 인간은, 세상은. 희생자에겐 동정과 연민을 베풀게 되어있는 곳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솔직히 ‘동정할 가치도 없다’라고 했던 제 말에 스스로 과격한 건 아닌가 찔려서 긴 덧글을 달았습니다… …

    함부로 동정할 가치가 없다는 둥, 그런 소리 내뱉는 ‘경솔함’은 자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정할 가치가 없다,라는 건 사실 피해망상이고, 과격한 표현입니다.. 측은 지심.

    잘 안되네요. 초등학교때부터 측은지심을 터득했다,라고 다른 곳에서는 잘난 척은 다 해놨는데. -) ^^;;

    조금만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 못 할 일은 없을 것 같고..남웅님 말처럼..
    폴란스키가 < 피아니스트>에서 낙관적으로 끌어올린 세계관이 다시 절망적으로 바뀐 것은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일지도 모르는데…

    이후의 일들은 폴란스키가 처리해나갈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에 계속 비극적으로 살아갈 것인지.. 세계적인 거장 감독으로 환대받는 것에 대해 그래도 운이 좋았다,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극복할 지…

    폴란스키 역시도 잘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운명에 프랑스인들과, 전세계 예술인들과, 그리고… 골방에서 저까지 슬퍼해주고 있으니,

    폴란스키도 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산다면, 조금쯤은 다시 운명이 폴란스키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

    1. 우왁! 이렇게 긴 글을. 그리고 님의 글에서 경솔함이나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자책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 저도 오늘 아는 사람과 만나서 폴란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둘의 공통적인 의견은 그의 영화는 참 좋지만 도덕성은 최악인 것 같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그의 영화를 계속 보고싶기는 하지만 그의 잘못을 생각하면 < 유령작가>가 마지막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고 얘기를 해놓고는 그래도 한 편을 더 만든다고 하면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마구 들더라고요. 참 인간의 마음이란 게 어렵더라고요. 다만 영화로 인간을 평가하면 안된다는 것 하나는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 같습니다. ^^

  5. P.S.

    (*남웅기자님과 저는 너무나 영화 취향이나 성향이 다른데…-제가 고지식한 부분이 있어서요-그래도 (인간성 들먹이면 촌스러운 사회가 돼서 인간성에 대한 칭찬을 하면 왠지 촌스럽게 여기실지 모르지만…) 인간적인 부분이 비슷하다 생각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보통은 대화를 나누기 보다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고 재단하고, (그 정도면 다행) 헛소리나 지어내고 (마치 미국의 언론처럼) 타인을 매도하지 못해 안달,하는 게 내가 7년간 살아온 세상인 것 같은데.. 저 역시 그런 기질이 있는 것 같아서 가끔은 씁쓸해지고 자괴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계속 헛소리나 지껄이며 자포자기처럼 사는데… 남웅기자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조금쯤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 점, 고맙게 생각합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1. 너무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항상 좋은 글, 그것도 장문으로 남겨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주로 영화에 관련한 글을 쓰지만 항상 너무 몰라서 한계를 느끼는데 할 줄 아는 게 또 이것밖에는 없다보니 매번 똑같은 글만 쓰게됩니다. ^^; 응원 감사드립니다. ^^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