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관람을 방해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러덜리스 Rudderless’는 키(rudder)가 없는 배처럼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제목으로 가져온 영화 <러덜리스>의 주인공은 심적으로 정상인 상태가 아닐 터다. 안 그래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주가 금지된 배 위의 요트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술과 함께 쓰레기처럼 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샘(빌리 크루뎁). 한 때 잘 나가는 광고 기획자였다. 지금 이 지경이 된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을 캠퍼스 총기 난사 사건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샘은 아들에게 친구 같은 아빠였다. 아들과 함께 다정하게 기타를 치는 사진이 증명한다. 이를 통해 아들이 뮤지션의 꿈을 키웠으니 검은 우물 속으로 침전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할까.
아들의 죽음 이후 2년, 샘은 여전히 후유증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그나마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건 술. 부족한 몸 안의 알코올을 채우기 위해 들어간 클럽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기회를 얻는다. 그의 음악이 귀를 파고들어 심장을 건드렸는지 아들뻘의 쿠엔틴(안톤 옐친)은 밴드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밴드의 이름은 러덜리스. 샘은 쿠엔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요트에서 지내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밴드의 이름을 짓는다.
그렇다, <러덜리스>는 음악영화다. <비긴 어게인>(2013)의 성공 이후 한국 극장가는 음악영화로 넘쳐난다. 과장을 섞자면, 음악영화와 음악영화가 아닌 작품으로 구별된다. 다시 말해, 웬만한 음악영화 가지고는 관객의 관심을 끌기 힘들다는 의미다. <러덜리스>는 결론부터 말해, 전혀 다른 음악영화다.
음악영화라고 하면 흔히 연인 간의 달콤한 사랑이 음악을 매개 삼아 예쁘게 포장되는 작품으로 인식한다. <비긴 어게인>의 성공이 국내 영화시장에 불러온 일종의 부작용(?)이다. <러덜리스>에서 연인의 사랑은 극 중에서 일찌감치 배제되는 관계이고 감정이다. 샘의 죽은 아들의 여자 친구가 잠깐잠깐 등장해 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지만, 미묘한 파장 정도다.
<러덜리스>를 연출한 윌리엄 H. 머시는 ‘구원’이라는 단어로 이 영화를 설명한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요.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은 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요? 결코, 단순한 대답일 순 없기에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죠. <러덜리스>는 제가 늘 이야기하고 싶었던 구원에 관한 영화입니다.”
윌리엄 H. 머시는 원래 배우로 더 친숙한 이름이다. 빚에 쪼들려 아내의 유괴를 사주하는 <파고>(1996)의 자동차 세일즈맨,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갖는 아내를 목격한 후 자살하는 <부기 나이트>(1997)에서의 포르노 영화 조감독, 칼같이 퇴근해 아내부터 찾는 <플레전트빌>(1998)의 평범한 가장 등 역할의 분량은 주인공에 미치지 못하지만, 소시민의 정서가 물씬한 캐릭터로 강한 인상을 남겨왔다. 그런 윌리엄 H. 머시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찢어진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러덜리스>로 감독 데뷔한 사실은 배우 때부터 구축된 그의 예술적 지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구원이라고 해도 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서의 완결된 형태를 지향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샘의 구원을 요청하는 형태다. 과연 샘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쿠엔틴을 사로잡은 샘의 음악은 실은 세상을 떠난 샘의 아들이 만든 것이다. 물론 아들이 만들고 세상에 남긴 곡을 아버지가 연주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리는 없다. (스포일러 주의!) 샘의 아들이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불거진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쿠엔틴을 비롯해 샘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샘은 가해자는 아니지만, 아버지라는 원죄 때문에 세상에 있지도 않은 아들의 죄로 고통받는 신세다. 그와 같은 죄책감과 더불어 그래도 핏줄인지라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마음마저 이겨내기 위해 술은 좋은 진통제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구원은 아니다. 그래서 <러덜리스>의 음악은 중요하다.
샘이 주변의 만류와 비난에도 무대 위에서 아들의 노래를 부르는 건 세상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 용서가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샘을 받아줘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 세상은 학교 총기 난사 사건처럼 끔찍한 일로 넘쳐난다. 그로 인해 피해받은 사람도 상당수다. 그중에는 샘처럼 가해자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가해자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의 삶은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일쑤다.
샘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구성원이다. 그에게 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건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서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해소되지 않은 갈등과 서로에 대한 적의는 화합과 평화를 좀먹을 뿐이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한 감정이다. 그럴 때 매개로 기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다.
음악은 조리 있는 말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감정에의 호소다. 샘의 과거를 알고는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던 이들도 그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동요한다. ‘도와줘, 내가 이해하도록 그 침묵을/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야 모든 것들에/ 모든 것이 바뀌었지 불이 켜진 뒤에는/ 솔직함이 우릴 바꾸네,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은 회복될 수 있어/ 떠난 것도 잊혀지지 않아/ 네가 여기 곁에서/ 함께 노래할 수 있다면/ 내 아들아
<러덜리스>는 영화의 엔딩에서 <Sing Along>을 부르는 샘의 얼굴을 응시한다. 노래가 끝나고 샘이 무대에서 내려간 후에도 영화는 샘을 응시하던 카메라를 치우지 않는다. 노래의 여운에 실린 어떤 감정인지 모를 묵직한 공기와 마이크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있을 뿐이다. 여러분들은 샘을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하지 않더라도 샘은 계속해서 아들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세상이 그와 아들을 받아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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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