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와 <메뒤즈 호의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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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영화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17세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의 생존기를 다룬다. 그런데 그 생존기가 만만치 않다. 단순히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227일 동안 버티어낸 일 때문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함께 생활했던 인물이, 아니 동물이 바로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파이가 망망대해의 한 배에서 리처드 파커와 함께 하게 된 상황이 지금의 한국사회와 흡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예컨대, 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진보 vs 보수 혹은 청년 vs 노인의 구도로 갈라지면서 분열된 상황이 딱 그 짝이라고 말한다. 서로의 입장에서 보건데 의견을 달리한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갈 일이 사나운 벵갈 호랑이와 생활했던 파이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냐는 거다. 그런데 파이가 그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겠단다.

그럼 파이는 그와 같은 벼랑 끝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더 정확히는 어떻게 리처드 파커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걸까. <라이프 오브 파이>가 집중하는 부분이며 그것이 바로 이 영화를 보며 사람들이 위안 받은 요지다. 사실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내용은 불안한 사회를 반영할 때나 힘든 생활을 은유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설정이다. 영화만 해도 <라이프 오브 파이> 외에 알프레드 히치콕의 <구명보트>(1944), 로버트 제메키스의 <캐스트 어웨이>(2000) 등이 있었고 미술에서는 일찍이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뒤즈 호의 뗏목>(1819)이 있었다.
 
<메뒤즈 호의 뗏목>은 부서져 가는 뗏목 위의 20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의 구조선을 발견하고 흥분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넘실댈 법한데 그림이 주는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잿빛의 구름과 파도, 갈색의 뗏목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데다가 피라미드 구도로 그려진 인물군의 아래쪽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될 정도다. 그림 왼쪽의 하단을 보면 죽은 아들을 무릎에 놓은 아버지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고, 뗏목 가장 자리에 아무렇게나 매달려있는 시체들이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 보이는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20대 중반 나이에 그린 이 그림이 1819년 ‘난파의 광경’이란 제목으로 공개되자 이를 본 관람객들의 반응은 경악 일색이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좋은 그림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던 당시에 시체를 묘사한 그림이라니, 거부감을 느낀 이들이 대다수였다. 더욱이 491*716(cm) 크기의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난파된 뗏목 위에서 그들 자신이 표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실제적인 위압감이 대단했다. 영화라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야말로 <메뒤즈 호의 뗏목>이 3D영화를 대신했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3D영화를 앞세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메뒤즈 호의 뗏목>처럼 고전적인 입체감을 지향한다. <아바타>(2009)를 위시한 3D영화들이 대개 관객의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영상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것에 반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전경과 중경과 후경, 즉 세 개의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화면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탄 구조선이 전경에,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중경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 후경에 놓이며 세 개의 레이어가 한 화면을 이루는 순간, 관객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때 3D가 주는 효과는 놀람보다는 사실감에 더 가깝다. 하여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이야기의 3D’라고도 평한다. 실제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제는 중년이 된 파이가 이 영화의 원작소설가인 얀 마르텔에게 직접 경험담을 들려주는 구조를 취한다. 벵갈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인 이유도 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1888년 조난당한 4명의 남자가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동료 세 명이 모의 끝에 나머지 한 명을 살해해 식량으로 삼았는데 그 희생자가 다름 아닌 리처드 파커였던 것. 그와 같은 사연이 영화에서는 서류상의 실수로 리처드 파커라는 사육사의 이름을 달게 된 것으로 바뀌었다.

<메뒤즈 호의 뗏목> 또한 압도적인 크기도 그렇지만 그림 속 내용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전달했을 테다. 사연은 이렇다. 1816년 7월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위해 프랑스 정부가 출격을 명령한 해군 군함 메뒤즈 호가 2주 뒤 난파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쟁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귀족 출신의 쇼마레가 지휘관으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 쇼마레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와 구명보트를 타고 먼저 대피하는 바람에 나머지 149명의 선원은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3일이 지나서야 구조가 되었는데 살아남은 이는 15명에 불과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서는 그림 왼쪽 하단에 놓인 피 묻은 도끼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물과 식량을 두고 급기야 살인이 벌어졌고 마침내는 인육을 먹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육을 말리기 위해 돛대에 매달기까지 했다는데 <메뒤즈 호의 뗏목>에는 노골적인 묘사가 제거되어 있다. 게다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다는 이들의 몸뚱이는 비쩍 말랐기는커녕 건장하게만 보인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리처드 파커의 경우처럼 테오도르 제리코 역시 비극적인 사연을 가져오되 작가적 상상력을 덧씌우니, 여기에는 어떤 신화적인 비장미가 생겨난다. 이야기의 3D효과랄까, 인육을 얼마나 먹었기에 생존자들이 저리 튼튼하단 말인가.  

언급한 두 작품의 내용에 대해 사실에 기초한다는 전제를 지우면 황당한 이야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생존자들이 인육을 먹었다거나 벵갈 호랑이와 구조선에서 함께 지냈다는 내용은 차마 믿기가 힘든 것이다. 안 그래도,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파이가 침몰한 선박 회사 직원에게 그간의 생존 과정을 설명하자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믿을 만한 이야기, 진실을 말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에 파이가 다리를 다친 얼룩말은 선원이고,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고,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은 하이에나는 주방장이고, 하이에나를 죽인 호랑이는 파이라고 고쳐 말하자 그제야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을 나타낸다.  

동물을 사람으로 바꾸자 선박 회사 직원들이 파이의 표류기를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 실제로 우리네 삶 자체가 일종의 표류하는 배위에서 생존을 위해 벌이는 투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메뒤즈 호의 뗏목>에서 테오도르 제리코가 인육과 관련한 직접적인 묘사를 제거한 의도나 <라이프 오브 파이>의 벵갈 호랑이 이름이 사람을 연상시키는 리처드 파커인 이유는 모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망망대해라는 삶 속에서 약육강식 논리가 횡행하는 인간사(人間事)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메뒤즈 호의 뗏목>과 <라이프 오브 파이>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작품을 통해 목적하는 바다.

<메뒤즈 호의 뗏목>의 화풍은 차가우면서 비극적이다. 이 그림의 목적이 바로 고발에 있기 때문이다. 지휘 경험이 전무한 이를 책임자 자리에 앉힌 프랑스 정부는 메뒤즈 호의 침몰과 그 이후의 경악할 만한 구조 과정이 알려질 경우, 비난을 살 것을 우려했다. 사건을 축소 보도하는 한편으로 사건 당사자 쇼마레에게 지위 박탈과 금고 3년형을 선고하는 선에서 졸속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에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메뒤즈 호의 뗏목>을 완성했다. 이 그림의 의도는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 정부의 도덕적 해이와 그에 따른 참사를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류의 고통 및 구조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삶의 은유로 치환한다. 언젠가 벵갈 호랑이와 같은 야수로 돌변할 수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가 전제하는 것은 그 누구도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파이는 227일 동안 망망대해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함께 했던 파커와 정이 쌓일 대로 쌓인다. 허나 어느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볼 것 없이 정글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파커를 보며 파이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길 없다.  

이것이 비단 파이와 파커 사이에만 해당하는 경우일까. 우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의견 차이가 생길 때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종종 마음을 상하고는 한다. 그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참 무례하게 굴며 각자의 영역을 침범해 왔던 것 같다. 박빙으로 펼쳐진 이번 대통령 선거가 증명한 경우가 아니던가. 우리의 이해수준이란 게 딱 그 정도다. 그래서 이해가 안될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삶의 지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존’은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하는 것, 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것일 테다.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화합은 애당초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이가 파커와 함께 했던 구명보트 안에서 살아남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파이는 허기에 지친 파커에게 생선을 줄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먹이를 주는 대상이 누구인지 서로의 영역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다. 인정과 존중은 즉, 관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거리(距離)를 뜻한다. <메뒤즈 호의 뗏목>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거리감이 상실됨으로써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경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존의 역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위안을 얻은 건 공존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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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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