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에드만> 등만 보면 흐르는 눈물의 정체

많은 이가 그러하듯 나 또한 아버지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 아예 안 보고 싶을 때가 많은데 뭐라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다. 돈을 번답시고 밖으로 나돌며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그의 과거를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사실 그 하나 때문에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얼굴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다르게 등을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 눈물이 쏟아진다. 도대체 왜?

<토니 에드만>이라는 영화가 있다. 전 세계 유수의 영화잡지가 선정하는 2016년 올해의 영화 목록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 상을 수상했고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도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독일 출신의 여성 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했는데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의 자전적 경험을 영화에 반영했다.

그러니 주인공은 사이가 좋은 않은 부녀로 설정되어 있다. 아버지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딸은 물론 부인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지 혼자 산다. 근데 혼자 사는 척을 하지 않는다. 누가 찾아오면 가발과 가짜 치아로 외모를 변신해 ‘토니 에드만’으로 행세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다.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판다 화장을 하고 나타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뭐 오늘 하루뿐인데 겉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저 먼 루마니아의 회사 업무에 복귀한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가 독일에서 회사에까지 찾아와 생일 선물을 챙겨주는 것도 모자라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며 변장을 하고 장난을 쳐온다. 이네스 왈, 아버찌 쫌!

부녀의 이야기임에도 나는 이네스에게 감정 이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니 에드만>을 봤다.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남 일 같지 않아서였을 테다. 특히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숙소로, 회사로 찾아와 이네스의 상사와 동료와 친구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황당한 변장으로 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일종의 폭력으로 보여 불편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당사자인 이네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감정이 폭발한 이네스는 딸의 상황에는 개의치 않고 화해라는 선의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쌓였던 불만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독일의 집으로 돌아가 달라 부탁하는 딸의 주문에 아버지는 고개를 떨군 채 얘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그 상황의 결말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끝난 듯한 발걸음으로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현대의 가족 관계는 이렇듯 복잡 미묘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처럼 가족의 갈등 관계는 단순히 가족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갈등의 우물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 수원지에는 가족 구성원 각 세대가 처한 환경과 지나온 역사와 그로 인해 확립된 입장 등 다양한 물줄기가 충돌하며 파문을 일으킨다. 같은 사안이라도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 만나기만 하면 돈 문제로 충돌하는 친척과의 관계 지속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럴 시간에 글이라도 한 줄 쓰고, 영화라도 한 편 더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을 통과한 아버지는 힘든 일을 겪게 되면 결국 기대는 언덕은 가족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친척의 대소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는 아버지를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빈프리트와 이네스 부녀도 다르지 않다. 아버지 빈프리트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인간관계로 파생되는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다. 변장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이네스는 다르다.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탓인지 동료를 밟고 넘어야 내가 살 수 있다. 그녀는 회사에 나갈 때면 늘 사회적 가면을 쓰고는 한다.

이 둘이 타인과 맺는 관계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아버지는 친근하게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은 일과 생활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가면을 쓴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들이 계속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차이만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일 거다. 변장하지 않고, 사회적 가면도 쓰지 않은 뒷모습에서 진심을 읽는다. 흰머리가 잔뜩 내려앉은 뒤통수와 축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은 부모가 자식 때문에 겪은 수난의 세월을 말없이 웅변한다.

피로 맺은 관계일지라도 그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 그건 설득으로 좁힐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넘어 인간관계가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뜻밖에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차이를 인정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럴 때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예컨대, <토니 에드만>과 같은 영화를 함께 나란히 앉아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영화의 마지막, 아버지와 딸의 극적인 포옹이 제공하는 감동이 제법 크다. 아버지 <토니 에드만> 같이 보실래요?

 

ARENA
201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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