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앤 해서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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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데이> 기자시사회에 참석했다가 옆자리에 앉은 어느 여자 기자의 볼멘소리(?)를 듣게 됐다. 멜로영화에 웬 남자들이 이렇게 많으냐는 거다. 순간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정말 몰라서 그래, 앤 해서웨이 때문이지. 그냥 앤 해서웨이인가, 예쁜 외모로 모자라 멜로 영화에서 종종 노출도 불사하는 연기로 뭇 남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오던 터가 아닌가.

스타와 배우 사이

아니나 달라, 기자시사회장에 모은 남자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원 데이>에서도 그녀는 짧은 순간이지만 노출 연기를 선보인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던 덱스터(짐 스터게스)가 못 잊을 추억 한 번 만들자며 알몸으로 물속에 뛰어들자 엠마를 연기한 앤 해서웨이 역시 잠시 망설이다 입던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 뒤를 따른다.

앞서 밝혔듯 그녀의 노출 연기는 역사(?)가 꽤 깊다. <러브&드럭스>(2011)에서 앤 해서웨이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화가로 출연한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파킨슨병을 앓고 있기에 진지한 관계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원 나잇 스탠드를 선호하는 그녀. 상대역인 제이크 질렌할과 질펀한 베드신을 연출하는 것은 물론 병 치료를 위해 상반신을 노출하는 연기도 불사하는 것이다.

노출이라기엔 뭐하지만 <레이첼, 결혼하다>(2008)에서는 동년배 여자 배우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섹스 신을 연기했다. 언니의 결혼식을 위해 약물 재활원에서 외출한 사이 피로연장에서 눈이 맞은 남자와 즉석에서 섹스를 갖는 것. 자고 일어나보니 공주가 되어버린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처럼 할리우드의 촉망받는 여배우로서 화려한 활동을 이어온 앤 해서웨이의 이미지를 감안하면 <레이첼, 결혼하다>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꽤나 놀라운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프린세스 다이어리> 이후 앤 해서웨이의 행보는 배우라기보다는 스타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쪽에 가까웠다. 성공한 작품의 속편(<프린세스 다이어리2>(2004)),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진취적인 여성(<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젊은 여배우라면 로망처럼 갖는 사극(<비커밍 제인>(2007)) 출연 등 인기 좀 있는 여자 스타라면 예측 가능한 행보를 이어온 까닭이다.

하지만 올 겨울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레미제라블>에서의 그녀 연기는 어떤가. 158분의 러닝타임에서 20분 남짓한 시간동안 출연하지만 팡틴으로 분해 ‘나는 꿈을 꾸었네 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힌다. 여배우라면 애지중지할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것은 물론 거지처럼 지저분한 분장에, 몸무게도 11kg이나 감량하며 펼친 연기는 화려한 여배우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곡을 예쁘게 부른다는 건 여배우의 이기심이다. 팡틴은 인생의 깊은 수렁에 빠져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다. 난 그런 팡틴의 절망적인 마음을 최대한 진실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의 앤 해서웨이는 캐릭터를 자기화하기보다는 자신을 철저히 동화시키는 연기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레이첼, 결혼하다> <러브&드럭스> <원 데이> 등 과감한 노출 연기가 가능했던 것도 자신을 볼거리로 만들기보다는 역할의 정당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우로써 자신을 따라다니는 평가나 명성에서 초월할 줄 아는 자기 확신이 존재하였기에 가능한 성과다.  

속박과 자유 사이

실제로 앤 해서웨이는 팡틴을 연기하면서 중요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친구가 팡틴으로 분한 나를 보더니 “앤, 너는 어디 갔니?”라며 놀라더라. (웃음) 예전 같으면 촬영 스케줄을 체크하면서 여유롭게 빈틈을 두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열정에 휩싸여 흥분했고 비로소 나와 캐릭터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내 일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사실 그녀가 연기에 눈을 뜬 첫 번째 계기는 조나단 드미 감독의 <레이첼, 결혼하다>에서였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현대 가족의 위기와 화해를 결혼식을 통해 들여다보는 영화다. 극 중 가족이 해체 위기에 몰린 건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킴 때문이다. 그녀의 운전 부주의로 남동생이 사망하자 가족 모두가 실의에 빠진다. 자책하던 킴은 약물 중독에 빠져 재활원 신세를 지게 되고 언니의 결혼식 때문에 외출하면서 잠잠했던 가족 간의 갈등이 수면에 떠오르는 것이다.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 가장 첨예한 갈등이 폭발하는 이 영화에서 결혼식은 현대 가족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이를 위해 홈 비디오 스타일의 핸드헬드 촬영이 도입되니, 앤 해서웨이는 평소와는 다른 연기 경험을 하게 된다. 기존의 작품들에서는 카메라에 맞춰 연기의 동선을 맞췄다면 <레이첼, 결혼하다>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킴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가 그녀의 연기를 따라다닌 것이다.

리허설 없이 즉흥 연기에 임한 까닭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는 앤 해서웨이는 당시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고도로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극 중 분위기와 상대하는 캐릭터에 맞춰 킴으로 머무르는 동안 배우로서 엄청난 해방감을 맛보았다. 내게 <레이첼, 결혼하다>는 잠재력을 폭발시켜준 작품이었다.” 그녀가 말한 해방감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올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경우를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을 앞두고 열린 LA의 어느 기자회견장에서 앤 해서웨이는 “캣우먼의 의상을 입은 느낌이 어땠나?”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녀가 답하길,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보다는 캣우먼 의상을 입고 어떻게 움직여야 어색해 보이지 않느냐에 더 신경을 기울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슈퍼히어로물과 같은 액션영화에서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은 여배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감사한다. 나는 놀란 이야기만 나오면 고마움에 눈물이 난다. 얼마 전에도 놀란 감독이 하는 ‘관객과의 대화’를 보러 갔다가 울고 말았다. 그는 나를 눈요기용으로 놔두는 대신 정신적으로 복잡한 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요컨대, 앤 해서웨이는 빛나는 외모로 관객의 관심을 끌지만 그 속에 담긴 복잡한 면모를 끌어내는 연기로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런 이중성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연기는 그녀를 좀 더 특별한 배우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다.

주연과 조연 사이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앤 해서웨이는 영화 속 분량에 상관없이 매 영화 ‘신 스틸러’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캣우먼의 출연을 알리는 첫 장면, 웨인(크리스천 베일) 저택의 하녀로 들어간 그녀는 목걸이를 훔쳤다며 브루스 웨인으로부터 추궁 당하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동정을 사려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눈빛을 표독하게 바꿔 브루스 웨인에게 대드는 장면은 앤 해서웨이가 가진 두 얼굴의 면모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레이첼, 결혼하다>에서는 또 어떤가. 겉으로는 안정을 얻은 듯 약물 중독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난 척 행동하지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언니 탓에 킴의 속내는 말이 아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모인 양가 인사 자리에서 하나둘 언니의 결혼에 대해 덕담을 나누는 가운데 킴이 마이크를 잡는다. 약물 재활원에서의 참기 힘든 재활 경험을 털어놓는 그녀의 차분한 음성에서는 악을 쓰지 않고도 분노를 표출하는 경제적 연기의 진수가 엿보인다.

그러니 장발장 역의 휴 잭맨과 자베르 역의 러셀 크로우의 대결 구도로 진행되는 <레미제라블>에 대해 앤 해서웨이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실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톰 후퍼는 ‘나는 꿈을 꾸었네’를 부르는 장면을 촬영할 당시의 앤 해서웨이의 연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말 특별한 광경이었다. 그녀의 연기는 숨을 멎게 할 정도였다. 열악한 세트와 그곳에 모인 스탭들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 정도 별 일 아니라는 듯 팡틴 역을 소화했다. 나는 앤 해서웨이처럼 오직 그 한 장면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고 작업에 임하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보통 명성 있는 배우들은 웬만해서는 오디션을 보지 않지만 뮤지컬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연기에 더해 노래를 불러야 했기에 <레미제라블>은 모든 캐릭터의 오디션을 진행했을 정도다. 그중 팡틴 역은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A급 여배우가 원했을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 속된 말로 미친 듯한 경쟁을 보인 오디션에서 앤 해서웨이는 톰 후퍼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권선징악의 주제를 온 몸으로 표현해 내어 팡틴 역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어디 그뿐일까. <레미제라블>에서 보여준 노력과 재능에 대한 보상으로 그녀는 벌써부터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의 강력한 여우조연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가히 앤 해서웨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만한 것이다. 1982년생인 여배우에게는 너무 빨리 찾아온 전성시대가 아니냐고. 하지만 그 전성시대가 빨리 시들 것 같지는 않다. <레미제라블> 이후 그녀는 애니메이션 <리오2>의 주인공 목소리 역에 다시 한 번 출연하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을 맡은 <로보포칼립스>의 출연도 확정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남성 관객들은 앤 해서웨이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것이다.

Trivia 팡틴은 내 운명?

앤 해서웨이에게 <레미제라블>은 운명과도 같은 영화다. 그녀의 어머니 캐슬린 앤은 배우 출신으로 한때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팡틴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앤 해서웨이는 어릴 적부터 엄마의 영향을 받아 연기에 관심을 보였고 7살부터 <레미제라블>의 공연장을 수시로 찾았다. 이번 영화는 물론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제작자이기도 한 카메론 매킨토시는 그 당시 이미 앤 해서웨이를 알아보고 어린 코제트 역을 그녀에게 맡길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영화에서 팡틴 역에 캐스팅된 앤 해서웨이는 촬영 첫 날 그녀의 어머니가 몇 년 동안 뮤지컬 무대에서 착용했던 재킷을 입고와 <레미제라블>과의 남다른 인연을 과시하기도 했다.

movieweek
NO. 559
 

 

2 thoughts on “두 얼굴의 앤 해서웨이”

    1. < 레미제라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천차만별인데, 앤 해서웨이에 대해서만큼은 만장일치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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