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를 품은 절제 – 손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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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도시>의 손예진은 예전의 그가 아니다. 치명적 독기를 품은 요부 백장미 역으로 생애 첫 악역에 도전한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한 독기를 뿜어내지만 동시에 절제의 미덕도 깨달았다.

손예진은 담백하지만 인상적인 언변을 가졌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확실해 쉬이 정신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언젠가부터 그가 하는 연기에서도 목적의식이 뚜렷이 읽힌다. 청순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역할과 과감하게 안녕을 고하며 코믹한 연기로 이미지 변신을 꾀한 <작업의 정석>(2005)을 전후해서부터다. <외출>(2005)에서는 불륜을, <작업의 정석>에서는 연애를, 드라마 <연애시대>(2006)에서는 이혼을. 개안이라도 한 것처럼 조심조심 단계를 밟아 연기의 지평을 넓혀오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 시기에 마음에 끌리는 작품이 들어왔어요. 아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역할들을 할 수 있었겠죠.”

광역수사대와 기업형 소매치기의 쫓고 쫓기는 대결을 다룬 <무방비도시>에서 손예진의 이런 변화의 열망은 더욱 가열차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이 영화에서 그는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는 형사 조대영(김명민)을 유혹하는 소매치기 조직의 리더 ‘백장미’를 연기했다. 치명적인 매력을 앞세워 남자를 깊은 수렁에 빠뜨리는 팜므 파탈 백장미는 손예진 연기 인생 최대의 파격으로 보인다. ‘떡대’ 같은 남자들을 발아래 두고 쥐락펴락하는 백장미는 맘에 들지 않으면 따귀도 날리고 거친 말투로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고 가는 다중적 얼굴을 지녔다.

몸으로 유혹하는 <원초적 본능>(1992)의 캐서린(샤론 스톤)보다 간교한 계략을 무기 삼는, <이브의 모든 것>(1950)의 이브(앤 백스터)에 가까운 캐릭터를 연출하기 위해 손예진이 택한 전략은 ‘절제’다. <무방비도시>를 연출한 이상기 감독에게 처음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거절한 이유도 겉으로 드러나는 카리스마가 강해 쉽지 않은 연기로 보였기 때문. 다시 한 번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백장미의 내면이 보여 마음을 고쳐먹었다. 과거의 아픔이 성장 과정을 통해 비틀리고 그러한 감정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올 때 백장미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리라는 것이 캐릭터에 대한 손예진의 해석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하고 세기만 한 팜므 파탈이라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절제하며 연기해야 캐릭터가 풍부해지고 매력적이겠죠. 조금 더 욕심을 낼 수 있는 장면에서도 절제하면서 살짝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어요.” 팜므 파탈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조건적인 섹시함보다 고급스러움을 보여주고, 차갑고 냉정한 카리스마의 빈틈으로 인간적인 면모가 얼핏 스치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무방비도시>에서 손예진은 외양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폭이 크진 않지만 은은한 가운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촬영 당시 이런 연기는 쉽지 않았다. 겉모습이야 주변의 도움을 얻어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지만, 내면까지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캐릭터를 자기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촬영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카메라 앞에서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투와 표정을 보여줘야 했거든요. 모든 걸 바꿔야 했어요.” 평소 습관과 행동양식을 버리고 나니 극중 백장미의 사소한 움직임을 매번 계산해야 했고, 계산된 연기에 따르는 부자연스러움을 떨쳐내려다보니 전에 없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연기가 만족스러웠을까. “<클래식>(2002) 촬영할 때 실력이 너무 부족해 3년 뒤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곽재용 감독님께서 손사래를 치며 ‘너의 현재 모습은 나중엔 보여줄 수 없다’고 하셨죠. 지금요? <무방비도시>의 백장미도 3년 뒤에 연기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 스스로의 연기에 부족함을 느낀다는 손예진의 이야기는 100% 진심은 아닌 것 같다. 작품 하나로 평가받기보다 필모그래프 전체를 통해 평가받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무방비도시>를 보고 난 뒤 ‘나이에 비해 연기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다’고 한 기자들의 반응을 과히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와 <외출>에서 한 멜로 연기의 성격이 전혀 다르듯, 비슷한 자장 안에서 변화를 꾀해온 노력이 시간이 지난 후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3년 전 제 연기를 보면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지금 연기하는 느낌과는 전혀 딴판인 거 있죠. 그래서 오히려 궁금해요. 3년 뒤에는 어떤 평가를 내려주실지 말이죠.” 그래서 손예진은 조급하게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할 생각이 없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천천히 필모그래프에 쌓아가며 하고 싶은 연기를 차근차근 펼쳐 보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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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9호
(2008.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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