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왕>(Le roi de l’évasion)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랭 기로디 감독의 <도주왕>은 ‘카이에 뒤 시네마’가 뽑은 2009년 베스트 10 중 한 편이었다. 국내에서는 2012년 9월에 개봉했지만 곧바로 VOD 서비스로 넘어간 불운의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재출간되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도주왕>은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로 배경을 옮긴 <롤리타>의 현대적인 버전이라 할 만하다.

아르망(루도빅 버딜럿)은 트랙터를 파는 영업사원이다. 영업수완도 좋고 돈도 많이 벌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43살의 게이다. 여자에 관심이 없는 아르망은 길을 가던 중 남학생들에게 위협을 받던 16살 소녀 퀴를리(합시아 해지)를 구해주게 된다. 이에 퀴를리는 아르망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아르망 역시 퀴를리의 그런 관심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퀴를리의 부모는 아르망에게 관심을 갖는 딸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러던 차, 아르망과 퀴를리는 도피를 결심한다.

<도주왕>은 선(線)을 넘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 선은 다름 아닌 사회가 임의적으로 정해놓은 규범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영화의 시작은 트랙터 영업사원들끼리 정해놓은 영업 구역을 침범한 아르망이 상대 회사로부터 항의를 받는 장면에 할애된다. 아르망과 퀴를리의 사랑이 곧 그렇다. 사회가 정해놓은 상식으로 보건데 이들의 사랑은 옳지 않다. 중년의 남자가 여고생을 사랑해 성행위를 갖는 것은 미성년자 간음 및 성추행에 해당한다. 서로를 사랑하는 아르망과 퀴를리가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도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의 도피의 배경을 좀 더 살펴보면 단순히 사랑을 인정받지 못한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르망의 경우,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고, 돈도 벌고, 평판도 좋지만 그것이 딱히 행복의 조건인줄은 잘 모른다.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의 틀 안에서 그 자신을 가둬왔기 때문이다. 퀴를리도 마찬가지다. 대학 진학보다는 하루 빨리 돈을 벌어 갑갑한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독립하고 싶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닦달하는 주위의 시선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 영화가 아르망의 캐릭터를 운용하는 방식, 즉 게이이지만 동시에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로 그린 것은 사람이란 임의의 범주에 가둘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성애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랑의 개념인가? 게이라고 여자를, 소녀라고 중년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학생의 본분은 공부에만 있는 것일까? <도주왕>은 이와 같은 편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아르망과 퀴를리가 산길, 풀숲을 도주로로 삼는 모습을 통해 이들의 욕망이 자연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인 편견을 만들고 논리를 강화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 이 범위에서 아르망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도주 행각을 벌이던 아르망은 퀴를리의 만류에도 불구,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르망이 퀴를리와 달리 (비록 성소수자이지만) 사회적인 강자에 해당하는 어른이자 남자이기 때문일까? 아르망과 친분이 있는 한 게이 노인은 “사정을 참으면 성행위를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도주왕>은 사회적인 도주를 이와 같은 차원에서 바라본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일탈을 벌이는 그 자체에도 쾌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서울아트시네마 동시대영화 특별전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