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김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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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숙은 <도둑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준 두 명의 남자를 만났다. 한 명은 <도둑들>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고 또 한 명은 극 중에서 김해숙과 호흡을 맞춘 첸 역의 배우 임달화다. 최동훈 감독은 김해숙에게 누구의 엄마가 아닌 다이아를 훔치기 위해 작전을 펼치는 도둑들 중 타고난 연기력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씹던 껌이라는 캐릭터를 선사했다. 임달화는 비록 김해숙과 국적과 언어는 다루지만 눈빛을 통해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씹던 껌과 첸의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최상의 연기 호흡을 맞춘 배우다. 김해숙은 최동훈 감독보다 연배가 높고, 임달화와는 동갑이지만 인터뷰 내내 존칭을 하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기술시사회 때 이미 영화를 보셨다고요?
너무 긴장해서 봤어요. <도둑들>은 제게 새로운 장르였고 50살 넘어서 맡은 역할 중에 가장 새로운 캐릭터였어요. 극 중에서 대사 치는 속도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어요. 무엇보다 최동훈 감독님 이름 석 자가 주는 부담감이 너무 컸어요. 어떻게 나왔나 긴장하면서 봤죠. 제 부분만 보게 되더라고요. 임달화씨와 함께 한 마지막 자동차 장면이 너무 멋지게 나와서 나 감동받았어. (웃음) VIP시사회가 돼서야 영화가 다 보이더라고요.

VIP시사회에서 보신 <도둑들>은 어떠셨어요?
<벤허>(1959)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님이 “하느님, 이 영화를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랬다죠. ‘이걸 우리가 해냈단 말입니까’ 하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너무 멋있었어요. 최동훈 감독님이 내로라하는 배우들 10명을 데리고 각각의 캐릭터를 살리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저라는 게 너무 감격스러웠죠.

최동훈을 만나다

김해숙은 늘 누군가의 엄마였다. 그래서 다른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엄마라는 꼬리표를 떼고 씹던 껌이라는 배역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해준 <도둑들>은 그녀에게 특별한 영화다. 거기에 상대배우 임달화와의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사랑까지 담겨 있으니, 김해숙은 <도둑들>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라고 말한다. “너무 행복해요. 이번에 제가 처음으로 여배우가 된 것 같았어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출연을 결심하셨다고요?
좋은 영화에 대한 갈망 때문에 답답해하던 차에 깜짝 선물처럼 <도둑들> 시나리오를 받게 됐어요. 영화를 제작하신 안수현 대표님이 당시 <푸른소금>(2011)을 하고 있었는데 송강호씨 위문 차 가게 됐어요. 그때 안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줬어요. <박쥐>(2009) 끝나고 제가 모 인터뷰에서 다음 작품은 누구랑 하고 싶으세요, 묻기에 최동훈 감독님이라고 했어요. 근데 정말로 그분이 연출하는 시나리오를 받게 됐어요. 창피한 얘기지만 눈물이 났어요. 꿈꾸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거잖아요. 그래서 제겐 선물 같은 작품이에요.  

엄마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둑들>이 더 반가웠던 걸까요?
(김)윤석씨가 어느 TV연예프로그램에서 저한테 안 분하세요? 물어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윤석씨를 좋아하는 게 배우 대 배우로 제 마음을 알아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저는 배우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역할에 대한 갈증이 크죠.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의 엄마였기 때문에 엄마를 떠나서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맡아 보고 싶은 욕망이 항상 있었죠. <무방비도시>(2007)의 소매치기 대모 강만옥이나 <박쥐>의 라 여사는 그런 갈증을 해소해준 역할이었어요. 근데 갈증을 풀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가 되풀이되니까 답답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그러던 차에 <도둑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최동훈 감독님과 함께 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셨군요?
<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를 보면서 감동받았고 <전우치>(2009)도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감독님이 절 캐스팅할 거라고 꿈도 못 꿨죠. <도둑들> 시나리오를 받고 감독님 작품에서 내 나이 또래 연기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게 이미 다른 감독님과 다르다고 느꼈어요. 저 같은 중견배우를 캐스팅해서 젊은 배우와 함께 호흡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모자라 그들과 비교해서 절대 비중이 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만들어줬다는 게 너무 감사한 거죠. 

평소와 달리 연기에 임하는 자세도 남달랐겠네요.
30년 넘게 연기를 했는데 당황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세계였어요. 씹던 껌은 도둑들 중 한 명이지만 캐릭터가 굉장히 섬세해요. 전에 했던 영화나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든 거예요. 특히 대사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너무 버거웠어요. 이 이상 어떻게 빨리 해요, 물어보니까 감독님이 숨 쉬지 마세요, 우스갯소리로 답해주시더라고요. (웃음) 감독님이 굉장히 정확해서 대사에 대해서도 초를 재고 계시더라고요. 제 나름대로 계산한 거와는 완전히 달랐던 거죠.

씹던 껌을 어떤 인물로 해석하신 거죠?
감독님은 소녀이면서 터프함도 엿보이는 여자 도둑을 원했어요. 근데 저는 강하면서도 멋있는 캐릭터로 생각해서 뭔가 보여주겠어, 이런 마음가짐으로 촬영장에 갔던 거죠. 완전히 오판이었어요. 그래서 첫 촬영이 미술관을 털고 난 다음 예니콜(전지현)에게 꿈을 사는 장면이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떨었어요.

촬영 전에 감독님께서 씹던 껌은 어떤 인물이라고 말해주시지는 않던가요? 그럼 긴장감을 좀 덜 수도 있었을 텐데요.
연기를 너무 잘하시려고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 이유를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해왔던 걸 알고 계시니까, 전혀 다른 장르를 저에게 입혀줘야 하니까 백지로 만들려고 그러신 것 같아요. 다 놓을 수 있도록 촬영 들어가기 전에 차근차근 다져나가시더라고요. 촬영 때는 일부러 ‘껌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고. 그러면서 저도 씹던 껌이 됐죠.

어느 순간에야 비로소 씹던 껌이 됐다는 생각이 들던가요?
첫 촬영을 마치고 잠을 못 잤어요. 너무 혼이 나서 제 자신이 싫었어요. 내가 오만해있었구나, 내가 이렇게 배울 게 많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착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거밖에 안되나 하는 생각에 밤새 울었죠. 감독님이 굉장히 현실적인 분이에요. <도둑들>이 장르영화지만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원하셨거든요. 두 번째 촬영이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미술관 장면이었어요. 촬영 전에 제 나름대로 동선을 세우고 밤새 연습을 했어요. 첫 촬영 때는 테이크도 많이 가고 감독님과 얘기도 많이 하면서 저는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근데 두 번째 촬영 때는 별 말씀 없이 웃으시면서 박수 쳐주시더라고요. 그제야 저도 이제 씹던 껌이 됐구나, 자신감을 갖게 됐죠.

임달화를 만나다

김해숙은 <경축! 우리사랑>(2008)에서 딸의 남자친구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는 파격적인 엄마 역을, <박쥐>에서는 아들에 대한 과한 애정을 드러내며 며느리와 대립하는 엄마 역을 맡는 등 또래 배우들에 비해 다양한 엄마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도둑들>의 씹던 껌은 이를 뛰어넘는 말 그대로의 파격적인 변신이다. 김해숙은 상대배우가 없었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변신이었다며 그 공을 임달화에게 넘긴다.  

홍콩배우 임달화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이 배우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요?
그렇게 유명하신 분을 제가 모르겠어요. 상대역으로 그렇게 멋진 배우와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건 상기되는 일이잖아요. 제가 인터넷으로 임달화씨를 검색해 본 이유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궁금해서였어요. 전 내심 살이 좀 쪘으면 바랐어요. (웃음) 안 변했더라고요. 젊을 때보다 더 멋지던 걸요. 그걸 보고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창피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살을 빼기 시작했어요. 한국과 홍콩이라는 국적을 넘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상대 배우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극 중 씹던 껌과 첸의 로맨스가 좀 더 길었으면 바라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그 정도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아요. 사실 감독님께서 저와 임달화씨의 멜로가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50대 중반의 멜로가 과연 어떻게 나올까 하고 말이죠. 50대라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40대만 해도 열렬하고 절실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죠. 반면 50대 중반의 사랑은 현실적으로 봐도 조금만 과하면 추할 수 있고 주책일 수 있는 그런 묘한 나이거든요. 감독님께서 과연 어떤 멜로를 어떻게 보여주실까 궁금하면서 걱정도 되고 설렜는데 선을 지키면서 아름답게 표현해주셨어요. 감독님과는 <도둑들> 하기 전에 잠깐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어요. 작품 얘기는 아니었고 다른 얘기를 하다가 감독님이 농담처럼 “선생님, 제가 옷 벗으라면 벗으실 수 있어요?”라고 묻기에 1초도 고민 안 하고 “감독님이 벗으라면 벗죠” 할 정도로 믿음이 있었어요.

연출의 공이 크지만 임달화라는 베테랑 배우와 했기 때문에 좀 더 자연스러운 멜로가 가능했던 건 아닐까요?
현실은 아니지만 제가 남자 복이 좋았던 거죠. (웃음) 제 딸하고 딸 친구가 VIP시사회 때 왔었어요. 얘들이 원래는 김수현씨를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까 임달화씨한테 완전히 반해서 그 분은 언제 오시냐고, 꼭 실물로 봤으며 좋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겉모습도 훌륭하지만 인간적인 면이 더 좋으시기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도둑들>을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이 좋아하고 아직도 보고 싶어 해요.

언어나 문화가 달라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안 그래도 언어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임달화씨가 너무 배려를 잘 해주셨어요. 게다가 배우들은 비록 말이 안 통해도 눈빛만으로 주고받는 게 있기 때문에 제가 연기를 드리면 그 분이 받아서 저한테 주시더라고요. 저희는 호흡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요. 오히려 짧은 영어였지만 서로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주고받을 정도였어요.

사랑은 말이 아니라 감정이잖아요. 오히려 언어가 안 통했기 때문에 멜로 연기가 더 수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렇죠. 첫 촬영이 끝나고 그분이 저한테 ‘딸링’이라고 불러주시더라고요. 딸링 딸링. (웃음) 그래서 제 별명이 한국 쪽에서는 껌 선생님이었고 홍콩 쪽에서는 딸링이었어요.

“김해숙은 무엇보다 입술이 참 섹시하다”며 임달화씨가 극찬하시던데요. (웃음)
진짜요? (웃음) 정말 달콤한 신사 스타일이에요. 실은 저의 이상형이었어요. 근데 저뿐만 아니라 나이 불문하고 모든 여자 분의 이상형일 거예요. 실제로 임달화씨와 한 시간만 이야기하다보면 그분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죠. 사람이 외모가 완벽하면 빈틈이 있어야 하는데 빈틈도 없고 겉과 속이 다 완벽하신 분이에요. ‘백마 탄 왕자’라고 해도 될 정도였어요.

임달화씨와 호흡을 맞추셨는데 한국의 배우와는 다른 측면이 있던가요?
한국이나 홍콩이나 배우 모두 굉장히 철저하고 열정이 똑같아요. 다르다면 시스템 차이인데, 저희는 제작진에서 요구하면 24시간 일을 할 수 있지만 홍콩은 12시간으로 딱 정해져 있어요. 홍콩은 이미 할리우드식으로 되어 있는 거죠. 이거 하나만큼은 철저하더라고요. 저희는 그런 관념이 없잖아요. 임달화씨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우리보다 더 심하게 고생들을 했더라고요. 그런 시기를 거쳐 지금 시스템으로 정착됐다고 하던데요. 개인적으로 부럽더라고요.

임달화씨와의 멜로를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하신 건 무엇이었나요?
어떻게 하면 서로 빨리 친해져서 호흡을 맞출 것인가에 대해 가장 먼저 고민했어요. 임달화씨가 항상 저부터 찾으면서 굉장히 잘 챙겨주셨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안 되는 대사지만 항상 촬영 전에 맞춰봤어요. 임달화씨 같은 경우는 일본어를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왜냐면, 홍콩 분들에게 일본어 발음이 너무 힘들거든요. 게다가 중국어는 사투리가 여러 개가 되는데 임달화씨가 쓰는 중국어 발음이 일본어를 하기에는 힘들었나 봐요. 일본어 선생님과 항상 함께 다니면서 대사를 체크하고 외우셨어요. 그런 후에 저와 호흡을 맞추면서 일본어 연습을 하시더라고요.

안 그래도 임달화씨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한 배우로 유명한데요. 어떤 부분에서 그런 면모가 느껴지시던가요?
총싸움 장면이요.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총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웃음) 더군다나 지하주차장이니까 소리가 또 얼마나 울리겠어요. 그 장면에서 임달화씨가 최고의 베테랑인 게 영화 속 그대로의 자동차 스피드로 롱테이크 촬영하는데 흐트러짐이 없으시더라고요.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나중에는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내리지를 못했어요. 그때 촬영이 끝나고 임달화씨가 딸링 그러면서 제 손을 잡아주시는데 그제야 내릴 수 있었죠.
 
그 장면에서 씹던 껌이 무서워하던 표정은 연기가 아니라 실제였군요. (웃음)
임달화씨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가 무사히 차에서 내릴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웃음) 총소리 팡팡 나죠, 유리 조각도 차 안에서 실제로 튀고 하니까 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죠. 이 나이에 정말 혼났어요. 이 나이 들어 연기하면서 무서운 게 없었겠어요? 임달화씨가 베테랑이어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나 소변까지 봤을 거야. (웃음)

그런 점에서 <도둑들>은 원했던 감독님과의 작업에, 새로운 캐릭터 연기에, 홍콩 최고의 배우와 함께한 촬영 경험까지, 앞으로 이런 종류의 영화를 다시 만난다는 건 쉽지 않겠어요.
최동훈 감독님이 또 만들어주시겠죠. 영화 찍으면서도 최동훈 감독님한테 얘기했어요. 걱정 안 해요 저는.  이 얘기 꼭 넣어주세요. (웃음)

movie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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