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가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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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셜로키언’이라고 엄청나게 뻐기고 다닌 적이 있다. 코난 도일이 살아생전 발표했던 장편 4편과 단편 56편을 적어도 2번 이상 읽었고 영화 속 주요 공간은 물론 홈즈와 관련한 박물관 등을 찾아 직접 유럽 여행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가장 먼저 영국 런던에 도착, 셜록 홈즈 동상이 맞이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전철 역을 나와 ‘베이커가 221b’를 방문했다. 그 부근으로 이동해 셜록 홈즈 컬렉션으로는 최고로 평가받는 ‘메리본 도서관’에서 귀중한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또한, 추리소설만 전문으로 다루는 서점 ‘머더 원’에도 부러 찾아가 영국인들의 추리소설 사랑을 직접 목격했다.

셜록키언이라면 빠질 수 없는 성지, 스위스의 ‘라이헨바흐 폭포’에도 다녀왔다. 라이헨바흐 폭포는 루체른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마이링겐의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1893년 출간된 <셜록  홈즈의 회상록>의 마지막 장에 실린 ‘마지막 사건’에서 셜록 홈즈가 범죄의 왕 모리아티 교수와 혈투를 벌이다 떨어져 죽은 장소다. 소설에서 상상했을 때보다 직접 찾았을 때 느낀 감동이 더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산 초입에서는 그저 자신의 의지에 반해 힘없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로만 보였던 폭포가 산 중턱에 오르자 다르게 보였다. 눈앞에서 위용을 드러낸 라이헨바흐 폭포의 거대함에 그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험한 물 구절 질에 압도당하던 그 순간, 흡사 내가 모리아티 교수와 최후의 결전을 앞둔 것처럼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랬다. 나에게 셜록 홈즈는 그저 소설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셜록 홈즈를 현실의 인물로 감정 이입했다. 내 마음속의 셜로키언 협회에서 회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귀국해서는 라이헨바흐 폭포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들어댔다.
“선배, 여행 갔다 오셨다면서요?”
“셜록 홈즈가 모티아티와 싸우다 떨어져서 실종된 장소 있잖아, 라이헨바흐 폭포 갔다 왔어”

여행 관련한 글을 청탁받을 때도 무조건 라이헨바흐 폭포였다.
“저희가 이번 여행 특집으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장소를 다루고 있는데요.”
“셜록 홈즈의 ‘마지막 사건’ 배경이 됐던 라이헨바흐 폭포 어떠세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셜로키언에도 나름의 등급이란 게 있다. ‘소설 속 내용을 줄줄 꿰고 있는 사람 < (나처럼) 소설 속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사람 < 읽고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홈즈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광의 단계를 두고, 처음엔 영화를 좋아하고 그다음엔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마지막으론 영화를 만든다고 정의했다. 셜로키언의 단계도 이에 빗대어 정할 수 있을 듯하다. 셜록 홈즈 소설을 좋아해 이를 소장하고, 이후 관련한 실재 장소를 찾아가고, 결국 그와 같은 경험을 토대로 책, 드라마, 영화와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것.

<주홍색 연구>가 1887년 출간된 이후 셜록 홈즈가 130년 가까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원작의 우수성과 더불어 이를 재생산하고 재창조하는 문화가 널리 퍼졌기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셜록 홈즈는 여전히 진행형인 콘텐츠다. 단적으로 빅토리아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긴 영국의 BBC 드라마 <셜록>은 시즌마다 시청률을 경신하고 있고 이미 내년 방영 예정인 시즌 4를 예고해 시청자의 기대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 상태다.

나도 <셜록>의 국내 방영 때면 실시간 시청하는 열렬한 팬이지만, 더 관심이 가는 콘텐츠가 있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홈즈로 현재의 작가들이 새롭게 쓴 ‘홈즈 소설’이다. 국내에도 꽤 많은 홈즈 소설이 출간된 상태다.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작가 앤터니 호로비츠는 <셜록 홈즈 실크 하우스의 비밀>과 <셜롬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을 발표했다. ‘간달프’로 유명한 이안 맥켈런이 93세의 홈즈로 분한 <미스터 홈즈>(2015)의 원작소설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도 꽤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가장 인상깊게 읽은 셜록 홈즈 소설은 그레이엄 무어가 쓴 <셜로키언>이다. 셜록 홈즈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워온 그레이엄 무어는 첫 번째 소설 <셜로키언>을 발표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1981년생의 젊은 소설가다. 우리에게는 2015년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이미테이션 게임>의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셜로키언>을 읽고 있으면 재미는 둘째치고 셜록 홈즈와 관련한 그레이엄 무어의 대서양 같은 지식에 라이헨바흐 폭포 한 번 다녀온 걸 가지고 셜로키언 운운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레이엄 무어에게 <셜로키언> 집필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저명한 셜록 홈즈 학자 리처드 랜슬린 그린의 사망이었다. 코난 도일 사후 사라진 문서를 두고 코난 도일 가문과 갈등을 겪던 중 발생한 사건인데 셜로키언 사이에서 꽤 유명한 일이라는 걸 난 이번에 처음 알았다.

코난 도일과 <드라큘라>의 저자 브램 스토커가 절친한 관계였다는 것도 <셜로키언>을 읽기 전에는 금시초문이었다. (줄리언 반스는 이 둘의 관계로 소설 <용감한 친구들>을 썼다!) 그레이엄 무어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상상력을 보태 각각 1900년과 2010년을 배경으로 삼는다. 자신의 집에 배달된 소포 폭탄의 범인을 잡으려 나섰다가 의문의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코난 도일과 브램 스토커의 사연을,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장을 두고 벌어지는 셜로키언 추격전을 교차로 서술하며 근사한 또 하나의 셜록 홈즈 소설을 완성했다.

그래서 이 글은 자격도 없이 셜로키언임을 자처하며 입방정을 떨어댔던 내 지난날에 대한 반성문인가. 셜로키언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준(準)셜로키언으로서 (곧 죽어도 셜로키언이라고 자처하는 나!) 진화하고 발전하는 셜록 홈즈 콘텐츠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언젠가 나 또한 셜록 홈즈 콘텐츠를 생산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 비로소 세상의 중심에서 ‘나는 셜로키언이다!’ 자신 있게 외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안 그러면 또 어떤가. 동시대에 가장 사랑받는 콘텐츠를 누리는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도 삶이 즐겁다. 특히 내게는 소설이 그러한데 종종 ‘그런 거’ 읽으면 얻는 게 무엇이냐, 는 얘기를 들을 때면 막 항변하고 싶어진다. 지식 습득에 한정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거나 돈을 벌 유용한 수단으로 정의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갈수록 독서 인구가 줄어들며 독서 문화가 경직되는 건 그와 같은 배경이 결정적이다.

독서의 더 중요한 기능은 오락이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다. 누구나 이야깃거리를 찾고 그중 누구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스마트폰에 밀려, 영상매체에 치여, 무엇보다 책 읽기를 공부와 동일시하는 사회적 환경에 함몰되어 갈수록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셜록 홈즈와 같은 콘텐츠가 더 주목받는 것이리라.

즐기는 건 순간이지만, 셜록 홈즈와 같은 콘텐츠는 순간의 유희로 휘발하지 않고 가능한 오래가도록 만든다. 문화가 가진 저력은 오락의 지속성에 있다. 세상에는 불행과 비극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살 만하다고 느끼는 건 우리 가까이에 즐길 수 있는 문화 ‘꺼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문화는 그 자체로 ‘공유’를 포함한다. 재생산과 재창조는 문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셜록 홈즈 콘텐츠는 그와 같은 문화의 본질을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다. 그 바탕에 있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지금은 셜록 홈즈 소설을 읽는 독자보다 드라마와 영화로 즐기는 팬들이 더 많지만, 코난 도일이 소설을 통해 셜록 홈즈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셜록 홈즈 콘텐츠도 존재하지 않았을 터다.

확실히 여러 모에서 미래가 잿빛인 작금에 소통의 다리를 놓아주는 건 셜로키언과 같은 팬덤, 즉 덕후 문화다. 국민의 하나 됨이 주입식으로 전달되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덕후 문화가 시사하는 바는 확실하다. 팬덤은 해당 팬들의 성격에 따라 폐쇄적이기도 하지만, 즐긴다는 목적에 따라 형성된 만큼 이루려는 방향이 일치하면 어렵지 않게 합종연횡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예컨대, 오랜만에 정치를 혐오가 아닌 오락의 시선으로 접근하게 만들어 준 건 필리버스터에 열광한 이들이었다. 필리버스터 그 자체로도 긍정적이었지만,‘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같은 1인 방송 프로그램에 익숙한 이들은 이를 감상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 회 레비전’로 오락화하며 더욱 재미있는 콘텐츠를 재생산, 재창조하며 정치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을 제시했다.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우리가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만들어 친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다.

요는,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요즘의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그나마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들의 상당수는 셜로키언과 같은 덕후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않나 싶다. ‘국민의 하나 됨’과 같은 일방향적이고 폭력적인 구호가 아무렇지 않게 난무하는 이 시기에 팬덤이야말로 순순히 오락적인 힘으로 이 세상을 자발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문화는 그래서 중요하고 이의 가치를 나누고 재생산하는 팬덤의 가치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는 앞으로도 ‘셜로키언이다’라고 주장하고 다닐 생각이다. 우리 모두가 셜로키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국민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라는 새마을 운동 시대의 구호보다 더 건강하다.

 

ARENA HOMME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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