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비고 모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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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첫 번째 기대작인 <더 로드>의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지만 한편으로 비고 모텐슨이 출연하는 까닭에 믿음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고 모텐슨만큼 유명세에 비해 필모그래프가 화려하지 않은 배우도 드물다. 오히려 그가 출연한 작품 목록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거스 반 산트, 피터 잭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등 거장의 이름을 한꺼번에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모호함이야말로 비고 모텐슨 연기의 정수다.


비고 모텐슨을 알아본 감독들

비고 모텐슨은 대기만성형의 배우다. <위트니스>(1985)의 젊은 농부 모제스 역으로 데뷔한 이래 <반지의 제왕>(2001) 아라곤으로 유명세를 타기까지 그는 15년 넘는 시간을 무명으로 지냈다.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그 기간 동안 <퍼펙트 머더>(1998)와 <싸이코>(1998)에서 모두 여주인공의 불륜상대로 등장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연기했던 그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각각 알프레드 히치콕의 <다이얼 M을 돌려라>(1954)와 <싸이코>(1960)를 리메이크했다!)

피터 잭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애초 아라곤 역에 캐스팅됐던 젊은 배우를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하차시키고 비고 모텐슨에게 역할을 맡긴 건 튀지 않으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연기 방식에 매료된 탓이 크다. 삼부작인데다가 다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묵묵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로 비고 모텐슨은 제격이었다. 다만 의도와 달리, 악의 무리에 맞서 중간계를 수호하는 액션영웅의 이미지로만 어필하는 그를 두고 피터 잭슨은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연기가 돋보였지만 그 때문에 미묘한 감정연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낼 정도였다.

피터 잭슨이 비고 모텐슨을 발견한 감독이라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비고 모텐슨의 진가를 비로소 펼쳐 보인 감독이라 할만하다. 크로넨버그는 비고 모텐슨의 미묘하게 드러나는 특징적인 연기를 높게 평가한다. “비고는 다면체 배우다. 여러 가지 재능이 표면 아래 침전해 있어 쉬이 드러나지 않지만 깊이 탐구할수록 미묘한 연기의 진가가 드러난다.” 안 그래도 크로넨버그는 할 말만 하는 경제적 연출로 유명하다. 한 눈 팔지 않고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연출 스타일상 비고 모텐슨처럼 껍질을 까야 진면목이 드러나는 연기는 그의 영화에 가장 적합한 형태였을 테다.

비고 모텐슨은 제레미 아이언스(<M. 버터플라이>(1993) <데드 링거>(1988)) 이후 크로넨버그와 두 편 이상 함께한 유일한 배우라는 점에서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크로넨버그가 신체 변형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SF적 상상력을 버리고 개인과 가족의 테마에 집중한 <폭력의 역사> 때부터 그를 파트너 삼았다는 사실에 비춰 이 둘의 관계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모호함이 정체성이 된 배우

비고 모텐슨과 작업한 감독들이 이구동성으로 밝히는 그의 캐스팅 이유는 하나로 요약된다.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는 인상이라는 것. <아팔루사>(2008)의 에드 해리스 감독은 ‘르네상스 시대에서 넘어온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히달고>(2004)의 조 존스톤 감독은 ‘말 못할 사연이 존재이유처럼 보이는 인상’을, <반지의 제왕>의 피터 잭슨 감독은 ‘수심이 가득 찬 깊은 눈’을 주요한 캐스팅 이유로 밝혔다. 하여 비고 모텐슨은 이들 영화에서 부패한 목장주를 위해 조용히 일처리를 해주는 총잡이(<아팔루사>),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죽음의 레이스에 참여하는 카우보이(<히달고>)를 연기하며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했다.

크로넨버그 역시 캐스팅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열망 속에 깊이 잠재된 다양한 면모에 끌렸다.” 다만 비고 모텐슨의 비밀스러운 이미지를 캐릭터의 일부로 차용한 감독들과 달리 크로넨버그는 정체성 문제와 연결해 전혀 새로운 캐릭터로 기능케 했다는 점에서 차별을 보인다. 비고 모텐슨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2001년 칸국제영화제 <반지의 제왕> 파티에서 만나 <폭력의 역사>로 의기투합한 이래 <이스턴 프라미스>까지 두 편을 함께 했다. <폭력의 역사>에서 모텐슨이 맡은 역할은 소박한 식당을 운영하는 톰 스톨이라는 사내로, 과거 잘 나가는 킬러였던 전적을 숨기고 지금은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에 반해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러시아 갱 보스의 운전사이자 해결사인 니콜라이 루진으로 등장하지만 그에게는 공공을 위한 중요한 임무가 있다.

두 역할 모두 진짜 정체를 가면 뒤에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비고 모텐슨의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와 부합한다. 흥미로운 것은 톰과 니콜라이가 거울을 가운데 둔 대칭형의 캐릭터라는 것. 한마디로 톰이 선의 가면을 쓴 악의 존재라면, 니콜라이는 악의 가면을 쓴 선의 존재라고 해도 될 만큼 두 인물은 정확히 대칭하는 위치에 서있다. 한 명의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톰과 니콜라이를 모두 비고 모텐슨이 연기했다는 사실은 크로넨버그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배우라는 존재가 캐릭터의 심리적 속성을 외형적으로 구체화한 형태라고 한다면 크로넨버그는 비고 모텐슨에게서 선과 악, 즉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이중성을 끌어낸 셈이다.

<폭력의 역사>부터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변화했다지만 사실 말하려는 바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그의 영화는 늘 경계선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개인을 다뤘다. 선과 악, 현실과 가상, 진실과 거짓 같은 이질성이 공존하는 크로넨버그 월드에서 주인공들은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크로넨버그의 캐릭터들은 쉽게 성격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형태를 띠고 있다. 비고 모텐슨이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모호한(morally ambiguois) 인물을 앞세워 관객에게 정체성 혼란과 같은 어려운 질문을 유도하는 크로넨버그의 전개 방식이 맘에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비고 모텐슨은 이 같은 캐릭터 유형을 출연의 우선순위로 삼아왔다. “도덕적으로 모호한 사람에게 끌린다. 내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모순됐다. 나는 그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어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선악의 애매한 지점에 위치한 인물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퍼펙트 머더> <싸이코>의 정부 역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G.I. 제인>(1997)의 경우, 여자라는 이유로 군에 들어온 데미 무어를 괴롭히다가 결국엔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교관을 연기한 건 그의 역할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그런 비고의 특징적인 캐릭터가 전면에 드러난 경우가 바로 <폭력의 역사>의 톰 스톨과 <이스턴 프라미스>의 니콜라이 루진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횡단하는 톰과 니콜라이에게는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갖춘 삶의 본질이 가감 없이 반영돼 있다. 하여 톰과 니콜라이를 비고 모텐슨의 필모그래프를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를 배우로써 규정하는 키워드는 단연 ‘모호함’ 혹은 ‘이중성’일 것이다.


다면체 배우이자 전방위 예술가

그런 모호함 내지 이중성은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캐릭터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배우로써의 삶과 일반인으로써의 삶이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또한 유명하다. 잘 알려졌다시피 모텐슨은 굉장히 다양한 범위에서 활동하는 전방위 예술가다. 배우이면서 한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운드트랙 중 ‘Aragon’s Coronation’을 직접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이다. 또한 <퍼펙트 머더>에 화가로 출연해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미국의 유수 갤러리에서 사진을 전시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2002년에는 외면당하는 글과 그림, 사진과 비평문 등을 출간하려는 목적으로 개인출판사를 설립했고 최근에는 시와 재즈가 혼합된 더블CD를 발표하며 전방위 예술가로써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활동을 두고 <더 로드>의 존 힐코트 감독은 “비고는 배우가 아니다, 인간이다. 배우와 일반인의 모습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자신만의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 배우는 종종 무명의 존재로 인식될 필요가 있는데 비고가 바로 그렇다. 그의 리얼한 연기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평가했다. 아닌 게 아니라, 비고 모텐슨은 캐스팅이 결정되는 순간, 배역의 일부분이 되어 캐릭터와 일체하는 방식의 연기를 펼친다. 예컨대, <반지의 제왕>에 출연할 당시 그는 ‘칼’이 아라곤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라고 판단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이를 지니고 다닐 정도였는데 자신의 차량으로 귀가하던 중 칼을 본 교통경찰에게 걸려 딱지를 뗀 일화는 유명하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도 그는 완전한 니콜라이 루진이 되기 위에 러시아를 여행했다. 혹자는 니콜라이의 실체가 드러나는 방식이 <폭력의 역사>의 톰과 동일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복된 연기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두 인물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건 다름 아닌 언어다. <폭력의 역사>의 톰은 겉보기엔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이지만 <이스턴 프라미스>의 니콜라이는 런던에 근거지를 둔 러시아 갱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니콜라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건 러시아 악센트가 강한 영어다. 이처럼 이중의 언어적 뉘앙스가 주는 미묘한 차이를 구체화한 캐릭터가 니콜라이였기에 그 미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비고 모텐슨은 배우의 신분을 숨긴 채 러시아를 다녀올 필요가 있었다. 계획처럼 모텐슨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 없이 평범한 여행객의 신분으로 러시아를 돌아다니며 배역을 위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비고 모텐슨은 연기를 영화라는 제한된 테두리가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칠게 정의하자면,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비고 모텐슨은 영화에서도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여전히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모텐슨이 크로넨버그 외에 한 편 이상 함께한 감독이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다양한 감독과 작업하며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통해 (그것이 비록 단역이었을지언정)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그의 이력은 연기를 통한 정체성의 여정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모호함은 다양한 색깔을 담기에 최선의 용기였던 셈.

크로넨버그는 비고 모텐슨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비고와 같은 성격배우를 좋아한다. 이런 배우들은 주연배우의 전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러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고는 더 많은 색깔을 담을 수 있는 팔레트와 같은 배우다.” <폭력의 역사>에서 함께 연기한 인연으로 <아팔루사>에서 감독과 배우의 관계로 만난 에드 해리스의 의견 역시 비슷하다. “그는 완벽하다. 비고의 수많은 자질로 보건데 복잡한 캐릭터를 맡을 만한 깊이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세세한 내용 하나하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면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아버지의 초상

비고 모텐슨이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성에 대한 지도를 그려나가는 동안 할리우드는 그에게서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다. 대중에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의 캐릭터가 배우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비고 모텐슨에게는 <반지의 제왕>이 그런 작품이다. <반지의 제왕>을 계기로 주목할 만한 작품에 출연하는 횟수가 많아졌는데 그중 가장 많이 맡았던 역할이 바로 ‘아버지’다.

사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은 전사의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지만 반지원정대를 이끄는 리더로서 특히 프로도의 안위를 음으로, 양으로 보호하는 역할이란 사실에 비춰 유사아버지와 진배없었다. 또한 <폭력의 역사>에서는 말 못할 과거를 숨긴 아버지였고(<이스턴 프라미스>의 니콜라이는 직접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부모 없는 아이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유사아버지로 기능한다!) <더 로드>에서는 종말을 맞이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걸고 지켜내려는 아버지로 등장한다.

언급한 역할은 모두 ‘아버지’의 범주로 묶이지만 캐릭터의 성격은 작품별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시대가 변할수록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아버지의 모습 또한 극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에서 징후적이라 할만하다. 가령, 아라곤은 절대 선을 추구하는 도덕적 인물이다. 하지만 톰 스톨은 겉으론 선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밑바탕에서 악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로드>의 아버지는 절대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한줄기 희미한 빛을 찾아 헤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라곤, 톰 스톨과는 또 다르다. 이처럼 각 캐릭터별로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차이는 마치 9.11 이후 미국이 테러에 반응하고 이후 그 속내를 드러내며 결국엔 위기를 겪는 최근 몇 년 동안의 변화한 궤적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모양새다.

할리우드가 비고 모텐슨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는 건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종종 고전적이라는 평을 듣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비교대상이 되는 배우가 전성기 시절의 로버트 레드포드, 폴 뉴먼과 같은 배우다. <반지의 제왕>에 함께 출연했던 동료연기자 숀 빈의 말을 빌리자면, “신사적이고 공손할 뿐 아니라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의 모습에서 1960~7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고전적 배우들의 느낌이 묻어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아버지의 초상으로 이보다 더 적합할 순 없다. 이런 기준에 가장 부합했던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이 비고 모텐슨이 연기했던 어떤 캐릭터보다 월등히 많은 관심을 모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크로넨버그처럼 자아분열을 영화적 테마로 삼는 이에게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란 가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더 로드>처럼 너무 변해버린 세상에서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기란 혼자 힘으로 세계를 구원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하다는 것을 비고 모텐슨은 또한 자신의 필모그래프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비고 모텐슨은 <반지의 제왕>과 <폭력의 역사>, 아라곤과 톰 스톨 사이의 넓은 간격만큼이나 차이가 큰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른 미국적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했고 그 결과, 할리우드 주류배우들과는 또 다른 비주류적 이미지로 미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이는 한편으론 그 자신 역시 고착화된 이미지의 캐릭터로 배우생활을 이어나갈 뜻이 없다는 무의식의 반영처럼 느껴진다. 그의 생활 자체가 그렇다. 덴마크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뉴욕 맨해튼에서 유년기를 보낸 비고 모텐슨은 아버지의 사업으로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덴마크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지냈다. 노마드적인 삶에 익숙해서일까, “어딘가에 머물기보다 두루 돌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연기도 여행하듯 즐긴다. 그래서 비고 모텐슨은 완성된 배우와는 거리가 멀다. 그만큼 화려하지도 않다. 뒤늦게야 배우로써 빛을 보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기만성형의 배우라는 꼬리표는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비고 모텐슨의 여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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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415호
(200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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