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로드> 부자(父子)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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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부터 먼저 고백하자면, 처음 읽은 책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이었다. 코언 형제의 동명영화에 감동 받아 바로 구입했던 것인데 그 때만 해도 장르를 제대로 가지고 놀 줄 아는 기교 있는 작가의 솜씨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이 짧았다. 그 후로 몇 권의 코맥 매카시 작품을 접하고, 특히 <더 로드>(2006)를 읽고는 그가 위대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 떠난 (혹은 잃은) 자의 이야기

존 힐코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는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면서 무난한 완성도를 보이지만 소설의 아우라까지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사실 <더 로드>는 영화화하기 쉬운 구조가 아니다. 영화는 에피소드 위주로 극을 전개하지만 소설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 공백처럼 남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압도적이다. 실제적인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딘가를 향해 길을 걸어가는 것일 뿐 그들 주변으로 스쳐 지나가는 잿빛 먼지투성이의 거리, 헐벗은 숲, 파괴된 문명의 흔적들로는 지구 멸망 이후가 배경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이는 코맥 매카시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구체적인 사건은 물론 배경에 대한 설명적인 묘사가 따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것은 코맥 매카시 작품의 테마가 집 떠난 혹은 보금자리 잃은 자가 길을 나서 생소한 세상을 경험하는 이야기인 까닭이다. 이 같은 경향은 가출한 열네 살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핏빛 자오선>(1985)부터 두드러졌다. 약탈과 살인이 횡행하는 19세기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가 배경인 이 소설은 세상의 악을 체득하는 소년의 성장기였다. 매카시의 작품치고 이례적으로 스릴러 공식에 충실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결국엔 돈 가방 때문에 집 떠난 후 결국엔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자의 이야기였다. 

<더 로드> 역시 다르지 않다. 이미 등장부터 부자(父子)는 머물 곳을 잃어 일정한 처소 없이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다만 드물게 제시되는 대화를 실마리 삼아 이들이 살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 매카시는 왜 세상이 파괴되었는지,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문명 파괴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 대재앙 그 자체다. 이들 부자도 ‘왜’를 굳이 따져 묻지 않는다. 그들에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극중 인물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나 입장에는 별 반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기거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세상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우선적으로 스펙터클이고 엄청난 볼거리다. <더 로드>의 대재앙을 맞은 세계나 <핏빛 자오선> 이후 일관된 ‘피에 젖은 황량한’ 서부 배경은 압도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할리우드가 그토록 코맥 매카시의 작품에 목을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핏빛 자오선>은 토드 필드가, <평원의 도시들>은 앤드루 도미닉이 준비 중에 있다.) 하지만 그만큼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매카시 작품의 스펙터클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매번 세상의 현재형은 지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매카시가 배경 묘사를 극히 제한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매카시는 극중 인물의 심리를 포착하는데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의 소설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전후한 반복되는 침묵과 사색 속에 의미가 발생한다. 볼거리와 이야기를 우선하는 상업영화에 이는 치명적인 요소다. 영화 <더 로드>는 사건의 지문 묘사와 심지어 대사까지 그대로 차용하지만 침묵과 사색까지 수용하지는 않는다. 영화만 가지고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극도의 폭력이 판치는 세계

영화의 능력 부족으로만 탓할 일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심리묘사는 주로 서술이 아니라 문장 그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에 도무지 시각화 해볼 도리가 없다. 코맥 매카시는 문장 구조가 곧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흔치 않은 작가다. 대개 번역 소설의 문장은 번역 과정에서 힘을 잃기 마련인데 코맥 매카시의 그것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문장에는 일체의 수식이 없고 감정이 실리지 않으며 그래서 짧고 서늘하다. 문장부호를 아끼면서 대화마저 지문(地文)처럼 소화하는 작가의 절제된 문체는 독자들을 극중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더 많은 생각, 즉 이면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흔히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두고 시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압축과 절제가 극중 세계를 이루는 근간으로 작용한 탓이 크다. 이처럼 코맥 매카시는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설명을 가능케 하는 화법을 구사한다. 이는 마치 피의 역사를 지면 아래 숨기고 있는 미국 서부의 속성과 닮았다. 서부의 사막은 황량하다. 드문드문 펼쳐진 바위절벽과 선인장을 빼고는 별다른 수식이 없다. 그런 사막 위의 인물은 목적지를 향한다기보다 헤매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래서 미국의 서부는 거대한 비밀의 장소로 기능하는데 코맥 매카시의 문체와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문체와 서사가 극적으로 결합한 <핏빛 자오선>을 시작으로 코맥 매카시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후 이어진 ‘국경 3부작’, 즉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은 <핏빛 자오선>에서 집약한 매카시의 세계관을 좀 더 세분화해 펼쳐놓는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은 17살 소년 존 그래디가 말 조련사가 되기 위해 미국에서 멕시코로 가는 여정을 담는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통해 악의 존재를 희미하게 깨닫는다. 배경을 멕시코로 옮긴 <국경을 넘어>는 빌리 파햄이라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길에서 만난 늑대를 고향으로 데려다주는 중 빌리는 영혼을 빼앗기는 사건을 겪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선과 악이 혼재한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모두 다 예쁜 말들>과 <국경을 넘어>는 서부극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엎는다. 코맥 매카시의 서부에서 ‘선’은 이상화된 개념에 가깝다. 기존의 서부극이 개척정신을 긍정적으로 포장한 것과 달리 극도의 악과 폭력이 판치는 세상인 것이다. 미화된 서부를 듣고 자란 아이들에게 실제의 서부는 충격 그 자체다. 안 그래도 국경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평원의 도시들>에서 만나게 되는 존 그래디와 빌리 파헴은 서부 사막에서의 지옥 같던 여정의 경험을 서로 공유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대화의 결론은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소년들의 결단이기도 하다.

<평원의 도시들>과 <더 로드> 사이의 작품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역으로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권유하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벨은 돈 가방을 두고 죽음의 추격전을 벌이는 모스와 시거의 뒤를 쫓는 보안관으로 등장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바라볼 뿐. 그리고 과거와 달리 험악해진 세태에 대해 한탄할 뿐.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마지막 문장, 벨의 독백은 그저 절망이라고 하기엔 내포하는 의미가 심상치 않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그래도 지켜야 한다

<더 로드>에서는 매카시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악에 물든 세계가 가장 최악의 형태로 구현된다. 세상은 이미 멸망한 상태고 하늘과 땅은 온통 회색빛이며 인간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본능이 이성을 억압하고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며 삶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이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을 세상으로부터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실제로 코맥 매카시가 <더 로드>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어린 아들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남부의 한 호텔에서 창밖 풍경을 감상하던 중 폐허가 된 세상이 오버랩 됐고 아들을 보호하겠다는 강한 부성애와 함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

‘아버지는 왜, 혹은 무엇 때문에 아들을 지키려는 것일까?’ <더 로드>가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않지만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 곧 홀로 서게 될 아들간의 대화는 단초가 되기 충분하다.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아버지에게 아들은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은 또한 신이 존재하는 유일한 근거이기도 하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불은 곧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불은 온통 얼어붙은 세상을 녹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가능성이다. 물론 그 불이 얼어붙은 대지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불을 지킴으로써 최소한의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 셈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더 로드>는 아버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아들의, 소년의 이야기에 가깝다. 이미 매카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 손 쓸 수 없이 타락한 현재와 무기력한 세대의 퇴장을 단정하며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희미하게나마 피력했다. 그리고 <더 로드>에서 야만의 세상에 맞선 아버지가 아들을 지켜냄으로써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야 만다. 이러한 상징성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더 로드>에서 노골적으로 암시되는데 이와 관련해 임지호(‘북스피어’ 편집장)가 쓴 ‘피로 새긴 서부 오디세이’(FILM2.0 2009년 1월 7일자)의 한 대목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더 로드>의 대재앙이 시작되어 멈춘 시간은 ’1:17‘로 나타나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또한 ’1:17‘이란 시각이나 ’117호실‘이라는 숫자가 이어 등장한다. 마치 성경 구절이라도 가리키듯이 말이다. 그의 묵시록적인 작품 성격을 생각한다면 <요한계시록>의 구절이 아닐까도 싶지만 그렇지 않다. 신약의 시작이자 복음서의 맨 앞에 등장하는 <마태복음>이 유력할 것이다. 구약은 예수가 오기 전의 일을 기록한 책이며, 신약은 온 뒤의 일을 기록한 책이다. 매카시에게 ’소년‘이라는 존재는 앞으로 닥칠 역사에 예수처럼 구세주가 될 인물이다. 소년은 그야말로 ’새로운 약속‘인 셈이다. <마태복음>의 1장 17절까지는 예수 이전의 계보, 즉 ’노인‘의 역사를 마감하고, 1장 18절에서 예수가 탄생, 즉 ’불을 운반하는 소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코맥 매카시에게는 장르는 기교도 허구도 아닌 현실이고 세계다. 그것도 희망이 없는 세계다. 그의 소설은 항상 이를 전제로 출발한다. 그래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곧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의 현재형은 지옥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얘기하겠다는 것이 코맥 매카시의 태도다. 그것은 곧 절망뿐인 세상에서 희망의 파편만이라도 발견하려는 작가의 절박함이자 초연함이다. 파괴적이지만 세상은 존재하고 절망적이지만 새로운 세대가 있기 때문에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로드>는 그런 코맥 매카시의 세계관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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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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