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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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에게 2010년은 남 다른 한해이었다. 1월부터 작업한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연출에, 8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두 달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대규모 전작전까지, 임권택의 이름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자신은 그저 바쁜 한해였다고 애써 의미를 축소한다. 하지만 영화와 생활에서 모두 거짓 없는 삶을 지향했기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음을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바쁜 1년이었죠?
경황없이 지내고 있어요. 그렇지만 결과가 좋아야지. <달빛 길어올리기>는 영화 촬영을 다 마쳤는데도 한지의 세계가 워낙 넓고 깊어서 알려줄게 너무 많다고 할 정도니까. 전작전의 경우는 2개월 동안 그렇게 많은 편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전 세계에서도 별로 없을 거요. 70편의 영화를 준비하고 상영한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들이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고. 


<달빛 길어올리기>는 어떤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복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지가 너무 좋은 소재인데 전혀 그 존재감이 없어요. 한지가 팔리지가 않아요. 인건비나 재료비를 생각하면 굉장히 비싸게 받아야 해. 근데 애당초 팔리지가 않으니까 잘 안 만들게 되고 점점 한지 만드는 기술이 퇴화되어 가고 있는 거지.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니니까 사람들이 잘 달라붙지를 않는다고.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 공무원이 무관심한 사람들을 설득해가면서 한지 만드는 과정을 영화로 찍은 거요.

직접 구상하시던 작품이 아니라 제안을 받으신 거라고요?
전주시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제안을 받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언젠가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막상 제안을 받고 보니 한지의 세계가 이렇게 깊고 넓은지 몰랐지. 전주가 한지 고장이란 말이요. 전주시는 옛날부터 장인들로 하여금 한지를 만들게 했다고. ‘조선왕조실록’ 같은 활자본을 보관하자는 취지로 우수한 종이에 독본을 시키려고 했단 말이야.

<취화선>(2002) 이후로 ‘한국에서 장인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픔’에 대해 두드러지게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장인으로 산다는 게 힘들어요. 돈은 둘째 치고 장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그 기술에 대해서 높게 평가를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잖아. 한지만 해도 우리 생활에서 안 쓰이는 데가 없단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접하는 게 한지라서 다방면에 쓰이고 있다고. 그 방대한 쓰임새와 역사를 갖고도 지금은 왜 이렇게 외면 받고 있나, 그것을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추적해 들어간 거지.

<취화선>은 수묵화의 느낌을 살린 배경을 가져갔습니다. <달빛 길어올리기>의 한지는 그와는 다를 텐데 형식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한지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고자 애쓰고 돌아다니는 전주시청 공무원의 행적을 따라간다고. 박중훈 씨가 7급 공무원 한필용 역을 맡았고 강수연 양이 한지문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영화라고. 강한 드라마보다 일상생활을 어떻게 재미있고 힘 있게 촬영해서 극영화로써의 느낌이나 재미를 살릴 것인지에 주력을 했지.  

<신궁>(1979) 이후로는 정일성 촬영감독님과 줄곧 작업해 오셨어요.
정일성 촬영감독은 이번에 안 했고. 내가 디지털영화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이번에 어떤 건지 알아야 되겠다 싶어서 디지털 영화를 많은 해본 젊은 기사와 함께 했단 말이야.  

반면에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송길한 작가님과는 <씨받이>(1986) 이후 24년 만에 만나셨어요.
<달빛 길어올리기>는 송길한 작가와 같이 썼지. <짝코>(1980)에서 처음 작업을 했는데 <안개마을>(1982) <길소뜸>(1985) <티켓>(1986)을 하다가 <씨받이>가 마지막이었나, 그러네. 24년 만이네. 오랜만에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었소. 송길한 작가는 촬영에 임박해서 합류를 했다고. 한지의 넓은 세계를 한 갈래로 잡을 필요가 있었어. 작가가 달라붙어야 하는 사안이라고 판단해서 부르게 됐지.  

배우 강수연과도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이후 21년 만이에요.
<달빛 길어올리기> 전에는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 두 작품 밖에는 한 것이 없는데 그때 여우주연상을 연거푸 수상하니까 (기자 주_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나하고 오랫동안 많이 한 걸로 착각을 하더라고. 40대 연기자로서 갖는 강수연 양의 매력을 담아보자는 생각에 배역을 맡긴 거요.

감독님은 한 번 맺은 인연은 제작자든, 배우든, 스태프든 굉장히 오래갑니다. 이번에는 빠지셨지만 정일성 촬영감독님이 대표적이죠.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호흡도 잘 맞고 또 임권택이라는 감독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했던 분들과 계속 하는 거요.


초창기 영화를 얘기한다는 것

임권택 전작전 개막식에서 “특히 초기작들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놨는지 궁금합니다.”라는 표현을 하셨어요. 다시 보니 어떻던가요?
언젠가 TV에서 ‘한국영화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60년대 액션영화가 방영되고 있더라고. 어디서 한 번 본 영화 같기는 한데 굉장히 저질스럽더라고. 뒤에 보니 내가 만든 영화요. (웃음) 1960년대 당시 십여 년간 만든 오십 편의 영화는 늘 안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걸 이번 전작전에서 봤는데 여전히 맘에 안 들고 그렇더라고.  

감독님께서는 항상 <잡초>(1973)를 진정한 데뷔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전 영화는 모두 거론하기 싫으신가요? <법창을 울린 옥이>(1966)는 걸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던데요. 
난 그 영화(<법창을 울린 옥이>) 몰라. 극중 이야기도 잘 모르고. 아이고, 보나마나 뻔해. (웃음) 제목이 뭐라고? 이거 수첩에다 적어야겠구먼. 

<잡초>는 분례(김지미)라는 여자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 수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감독님의 진정한 첫 영화로 생각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그 전까지는 거의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허구의 영화만 찍었다고. 그때는 내가 미국영화의 2류 수준으로 내 영화를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지. 근데 제작환경이나 기제나 모든 면에서 말이 안 되거든. 그거를 간파하고는 미국영화의 아류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살길이 없겠다 생각을 한 거라고. <잡초>는 흥행에서 완전히 실패했는데 나는 지금도 왜 그 작품을 가지고 얘기 하냐면, 거짓 없는 삶의 이야기를 했다고.  

정창화 감독님의 <장화홍련전>(1956)부터 영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장화홍련전> 찍을 때 중간에 들어간 거요. 내가 1953년도인가에 (전라남도의 집을) 가출해서 부산으로 갔다고. 노동판에 있었는데 휴전이 되고 그때 미군 군화 장사하던 분들과 알게 됐지. 그분들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어쩌다 영화판에 들어가게 된 거지. 내 스스로가 영화 만들기를 꿈꾸거나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고.

정창화 감독님은 액션과 사극 연출에 출중하셨어요. 임권택 감독님 초창기 액션과 사극 영화가 많은 건 이와 무관치 않죠?
그렇지, 거기서 많이 배운 거지. 그래서 데뷔 이래 내가 액션물을 많이 찍었어요. <장군의 아들>(1990)이라는 액션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때 배운 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는 전쟁 장면이 포함된 대작영화이고, 네 번째 영화 <망부석>(1963)은 사극입니다. 신인감독이 연출하기에는 어려운 영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당시는 지금처럼 영화를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감독한테 예고편 같은 것을 맡겼다고. 안 맡기는 감독도 있었지만 정창화 감독님은 나한테 맡겼어요. 나는 감독할 생각도 안 했고 언감생심이었지. 그런데 제작자가 보기에 내가 만든 예고편이 맘에 들었던 거야. 감독 한 번 해보라고 제의가 들어온 거지.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개봉했던 구정은 최고 좋은 흥행 시즌인데 이것저것이 잘 맞아서 흥행이 됐다고. 한 번 홈런을 쳤기 때문에 언젠가 또 칠 수 있는 놈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끊임없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지. 운이 좋았던 거요.


임권택에게 영화란

감독님의 101편의 필모그래프에서 유일하게 관통하는 공통점은 영화적인 환상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독님의 영화적 윤리라고 해도 될까요?
나는 환상이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뼈아프게 느끼면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기자 주_ 부친과 삼촌의 좌익 경력 때문에 임권택 감독은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삶 자체를 그렇게 보고 있는 거요.

그것을 한(恨)의 정서라고 해야 되겠죠. 한국인의 삶이라는 게 과거의 아픈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요. 그래서인가요, <짝코> 이후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유독 회상 장면(Flash Back)이 두드러집니다.
그런 것보다는 극중 이야기를 순서의 나열식으로 해나가면 속도도 떨어지고 지루해진다고. 그래서 플래식백을 이용해 속도감 있게 많은 얘기를 담아내려고 했지. 그거 많이 안 해본 사람은 아주 힘들어해요. 

감독님 영화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떠돌아 다녀요. 특히 <만다라> 이후 ‘길’은 감독님 영화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영화를 만드는 일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내 자신이 만날 떠돌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이 반영돼서 그런 거요.

<만다라>는 그런 감독님의 삶과 영화 인생이 맞물리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번 전작전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됐습니다. 불교에서는 ‘산다는 건 고통’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응용하자면, 감독님에게는 ‘영화 만드는 것이 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산다는 게 바로 그런 거요.

<만다라> 이후 <천년학>(2007)에 이르러 비로소 주인공이 처음으로 집에 정착합니다. <천년학>이 100번째 영화인 것과 상관이 있을까요?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라고. <천년학>이 100번째인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고. 그런 얘기들이 나올 것 같아서 <천년학>을 만들 때도 그 장면을 아주 간단하게 찍어 훌쩍 넘기고자 했다고. 그런데 그게 안 된 거지.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얘기를 듣다보니 감독님께서 101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매 작품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건 당연하지. 자기가 해놓은 것에 대해서 뭐인가 만족하고 주저앉으면 그걸로 끝이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삶을 솔직히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그래서 도리 없이 고통을 수반하게 되요. 유행이나 시류를 타지 못해 흥행이 안 된다고 할지언정 진심만 있다면 영화가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 <만다라>만 해도 당시에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어. 삶 자체를 밝게 보지 않고 갑갑하고 칙칙하게 그려냈으니까. 이번에 다시 보고 옛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지금 읽어냈다는 사람이 많아. 나한테는 최고의 찬사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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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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