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오바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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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른 감이 있지만 당신의 2012년 블록버스터 기대작은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지즈 The Dark Knight Rises>(이하 ‘<라이즈>’)를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다. 개인적으로도 <라이즈>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픈 심정이다. 워낙 <다크 나이트>(2008)가 남긴 인상이 강렬했기에 놀란이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라이즈> 티저 포스터를 비롯해 현장 스틸이 속속 공개되는 것을 보니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근데 나는 좀 다른 이유에서 이 영화가 기다려진다. 2012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숨겨 놓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다크 나이트> 때로 돌아가 보자.

왜 뉴욕이 아닌 시카고인가?

거대한 빌딩 숲을 휘젓는 조커(히스 레저)의 은행 강탈 행각으로 오프닝을 여는 <다크 나이트>의 시작은 어딘가 좀 낯설다.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Gotham City)는 뉴욕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카고가 주 무대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배경 교체라기보다는 이 시리즈가 품고 있는 세계관의 근간을 흔드는 것에 가깝다. 고담은 뉴욕의 옛 이름이면서 코믹북 작가 프랭크 밀러(<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밤 시간대의 뉴욕시를 칭할 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담의 악을 숙주삼아 탄생한 배트맨은, 그래서 ‘어둠의 기사'(Dark Knight)로도 불린다. 다시 말해 배트맨의 탄생설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담시는 시리즈의 대명사 격에 해당한다. 그런 고담의 배경이 시카고로 바뀌었다? 필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크리스천 베일)과 조커의 대결로 압축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방검사 하비 덴트(아론 엑하트)의 영화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왈, “하비 덴트의 에피소드를 비극으로 만들어 또 하나의 중심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 검은색 슈트와 하얗게 회칠한 얼굴, 질서 수호자와 파괴자 등 배트맨과 조커가 노골적으로 정반대에 선 인물인 것과 달리 하비 덴트는 ‘흑과 백’의 구도 속에 섞여 들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섣불리 예상할 수 없는 회색빛 이야기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는 영화 중반까지 고담시의 미래를 책임질 차기 시장으로 주목되다가 연인 레이첼(매기 질렌할)을 잃은 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대상을 향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극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지만 나는 오히려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차기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영화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설정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브루스 웨인은 하빈 덴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시장 선거 후보로 후원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이에 덴트는 “선거는 3년 뒤인데요”라고 난색을 표하자 웨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후원하면 당선이나 다름없다고” 사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존재가 어떻게 고담시를 더욱 위험에 빠뜨리는지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그런 의도에 비춰, 언급한 웨인과 덴트의 시장 선거 얘기는 영화의 주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던 2008년 미국의 정세를 상기한다면 이들의 대화와 관련한 흥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크 나이트>의 미국 개봉(2008년 8월 6일)이 있기 두 달 전인 6월 4일 버락 오바마는 전당 대회에서 과반수의 대의원을 확보하며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그 기세를 이어 2008년 11월 4일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터뷰를 통해 “<다크 나이트>처럼 거대 규모의 영화를 다룰 때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활용한다. 오락적 성격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세상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영화에 더 큰 힘을 제공한다.”라며 의도를 밝혔다. 하비 웨인을 연기한 아론 엑하트 역시 “<다크 나이트>는 오늘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대본 안에 있다고 믿고 연기했다.” 결국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인 묘사로 슈퍼히어로물의 새 장을 연 <다크 나이트>는 현실, 그것도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염두에 두고 하비 덴트에게 차기 시장의 이미지를 덧씌워 알레고리화했다고 심증적으로 강하게 확신하는 쪽이다.

<다크 나이트>가 조지 부시 이후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를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바마는 이미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그 유명한 연설 (“진보의 미국도, 보수의 미국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로 유력한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급부상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덴트는 무너진 고담시의 법치질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지역 마피아와 손잡은 공권력의 부패가 도시를 나락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강조, 악의 퇴치에 앞장서며 고담시를 구원할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브루스 웨인이 하비 덴트를 후원함으로써 고담시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듯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적 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목격한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라는 새로운 영웅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놀란 감독은 극 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를 전략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해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임을 은연중에 환기시킨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일 뿐 아니라 정치생명의 꽃을 피운 자궁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등에 업고 워싱턴의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다크 나이트> 개봉 당시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도시를 꼽자면 단연 시카고이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주자였던 버락 오바마가 연고로 삼고 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놀란이 <다크 나이트>에서 뉴욕 대신 시카고를 배경으로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원작의 실제 배경을 바꿔가면서까지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바마가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한 것에 대해서 어떤 혼란을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 정치의 ‘투 페이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버락 오바마에 대한 충고?’라고 적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덴트 역의 배우를 백인인 아론 엑하트가 아니라 흑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냐는. 그럴지도. ((흥미롭게도 팀 버튼이 감독한 <배트맨>의 하비 덴트는 흑인이다!) 사실 내가 <다크 나이트>를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난 후 이 영화를 ‘다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다. 다만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의 미국적 상황을 고려하건대 조지 부시의 이념과 반대되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거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도 관여한)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그런 인물은 당연히 오바마였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배경을 왜 시카고로 했을까?) 너무 대놓고 드러낼 경우, 장르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었던 까닭에 우회적인 캐스팅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비 덴트 역에 아론 엑하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놀란 감독이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할 영웅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건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놀란 감독이 하비 덴트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미국의 이상주의는 무엇일까.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은 전쟁광 미국이 아닌 세계평화를 진두지휘하는 리더국가로서의 지위 회복? 여기서 잠시 덴트와 오바마의 연결성은 제쳐두고 질문을 다시 해보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당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유력했던) 오바마에게 무엇을 충고하고 싶었던 걸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했을 영화에 구지 하비 덴트를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극단적인 가치 추구는 광기와 다를 바 없다. 즉, “진실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조커의 말을 빌린 놀란 감독은 흡사 ‘흑과 백’의 구도로 흐르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사이에 ‘투 페이스’ 하비를 끼워 넣고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켜 현실 정치의 회색빛 진실을 알려준다. 정치라는 것은 동전 던지기처럼 한 면을 살리고 한 면을 죽이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2008년 대선 당시의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들이었다. 백인과 흑인, 전쟁과 평화,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미국의 가치를 몰락시킨 구시대적 인물과 위기에 빠진 미국을 구해내야 할 구원자까지. 2008년 미국 대선은 조지 부시 정권을 심판하는 자리이면서 새 시대의 미국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다크 나이트>에는 흥미로운 대사가 등장한다.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묘사하는 조커와 배트맨은 노골적으로 다르지만 극단적인 선과 악은 서로 닮은꼴이듯 그래서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캐릭터는 어느 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하비 덴트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물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세계정세의 판도가 달라질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전 세계에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왔는가?  

<다크 나이트>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크 나이트>는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며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한다.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와 같아서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자신까지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고담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이었다가 희망이 꺾이자 곧바로 조커의 영역에 투신하는 하비, 아니 투 페이스의 행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바꿔 말해,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악을 완전히 뿌리 뽑을 필요가 없다. 그랬다가는 더한 반발을 불러 세상은 더욱 혼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 스스로가 악역을 맡아 악을 적절히 용인하는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더 정확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버락 오바마에게 말이다.

놀란의 바램처럼 오바마는 세계정세를 조율하는 데 있어 꽤 솜씨 좋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대 이스라엘 정책이 좋은 사례가 될 듯하다. 오바마 취임 초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자 세계의 이목은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오바마가 동전 앞면을 선택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 뒷면을 선택해 전쟁을 묵인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지 말이다. 오바마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약속합니다. 위협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해 중동국가의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이후 오바마의 대 이스라엘 정책은 취임 초반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新)중동정책이라고 하여, 지난 5월 오바마는 “이스라엘과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선은 1967년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를 근거로 해야 한다”면서 “양국이 서로 영토를 주고받는 데 합의함으로써 안정적이고 명확한 국경선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며 이스라엘을 경악케 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요구에 처음으로 동조한 의견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요, 현실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 들어가지 않은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경우다. <배트맨 비긴즈>(2005) 이후 이 영화가 현실감을 극도로 강조하는 이유는 허구의 느낌이 강한 슈퍼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를 높이려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놀란 감독의 충고처럼 오바마는 어느 한쪽 편에 기대 극단적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중도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지난 3년 동안 미국을 이끌었다. 그동안 미국의 경제를 되살리지 못했다고 하여 지지율이 바닥을 치기도 했지만 오히려 외교정책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며 안보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금 미국인들의 신임을 얻어가는 중이다. 앞으로 이라크 철군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마무리만 확실히 할 수 있다면 1년 앞으로 다가온 재선에서도 좋을 결과를 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라이즈> 역시 미국 대선(2012년 11월 6일)이 가까이 온 2012년 7월 개봉이 예정된 상태다. 이번에도 놀란 감독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라이즈>를 꾸밀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것이 내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하루 빨리 확인하고 싶은 이유다.

관련기사: <다크 나이트 라이즈> 민중이여 봉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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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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